PD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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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시간을 꼬박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3일' PD의 1년
편성, 마감에 쫓기다가도 몰입하는 순간은
  • 이은미 KBS PD
  • 승인 2020.10.2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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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이은미 KBS PD] <다큐멘터리 3일>의 가장 강력한 포맷은 72시간이다. 한 번쯤은 깨질 듯도 한데, 제작진이 수차례 바뀌면서도 13년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프로그램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다큐3일>은 사주가 참 센 프로그램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시대에 <다큐멘터리 3일>도 ‘비대면 제작’이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중 시간을 빼고는 정체성을 논할 수 없는 프로그램에 근간을 흔드는 질문을 동료에게 던졌다.

“시간이란 뭔가요?”
“시간이란.... 리얼리티죠”

시간은 곧, 리얼함의 상징이라... 이제 와 고백하자면,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다. 때로는 느렸다, 때로는 빨랐다 해서 ‘시간은 곧, 상대성’이라는 물리적 개념이 내 머릿속에 은연중에 있었나 보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시간, 너는 누구냐!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필름 더 클락>이라는 비디오 아트를 언급한 적이 있다. 작품을 관람하는 시각이 2시라면 이 영상 속 시계 소품도 2시를 가리킨다. 작품 안에서 10분이 흘렀다면, 관객의 실제 시간도 10분이 흐른다. 시간의 절대성을 가장 잘 나타낸 콘텐츠다.  

반면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로 내려가자마자 영화관에서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을 관람했는데, 당황스러웠다. 시간의 순행과 역행을 같은 공간에 배치한 액션 장면에서 스토리를 따라가야 할지,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다음 장면을 넘어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심장은 스릴을 느끼면서 머리로는 저게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따지다 보니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실제 시간보다 영화가 짧게 느껴졌으니 시간의 상대성을 그대로 체험한 순간이다. PD로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방송 시간이 짧게 느껴지더라”라는 말인데 놀란 감독의 연출력이 부럽기만 하다.  

전 세계인의 일상을 모습을 담아 구성한 다큐멘터리. 'life in a day 2010'
전 세계인의 일상을 모습을 담아 구성한 다큐멘터리. 'life in a day 2010'

최근에는 ‘시간’이라는 장치 때문에 진정성이 배가 된 작품을 봤다. <하루에 담긴 삶(life in a day 2010)>는 선배PD가 알려줘서 알게 된 다큐멘터리 영화다. ‘블레이드 러너’를 제작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10년 7월 25일에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상적인 하루를 찍어 보내달라고 했고, 그렇게 모인 영상을 하루 24시간으로 담아 구성했다.

양치는 모습, 출근하는 모습, 점심 먹는 모습, TV 보는 모습 같은 조각조각 짧은 클립들을 두 시간 넘게 보고 있자니, 코믹이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이 쑤셔서 힘들었다. 그래도 선배가 추천해 준 작품이라 끝까지 봤다. 영화의 마지막, 24시간이 마무리되기 직전에 한 여자가 어두운 차 속에서 자기 고백 형식으로 인터뷰를 한다. 특별한 오늘 하루를 찍어 보내고 싶었는데, 자신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었다고.

가슴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울컥’인지 ‘뭉클’인지 잘 모르겠는 감정이었다. 현실의 냉정함이 느껴졌고, 그래서 사실적이었고, 때문에 공감이 되었다. 순차적인 시간의 나열로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PD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편성 시간, 러닝 타임, 마감 시간... PD의 삶은 시간을 쪼개고, 때로는 쫓기고, 출퇴근 시간 상관없이 프로그램 생각이 따라다니는 일상이다. 하지만 편집실에 오롯이 혼자 남아 타임라인 위 시퀀스를 마음대로 주무를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게 되다. 때로는 시간을 축약하고, 때로는 반복하고 시간을 늘리고.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실제로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방송으로는 2분 이상을 끌고 간다. 쫓기는 시간이 아니라 주무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위로가 된다. 

그렇다 해도 ‘방송국 놈들’에게 시간에 얽힌 가장 큰 미스터리는 방송을 몇 편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방송사에서 일하는 PD들에게 유독 빨리 흐르는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시간을 리얼리티라고 주장했던 동료에게 말하고 싶다. “거봐요, 시간은 상대성의 원리로 흐른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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