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가 요정을 만나지 못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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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가 요정을 만나지 못했다면
유아 프로그램에 '성평등' 가치 살렸더니, 동요·구전동화 확연히 달라져
  • 최현선 EBS PD
  • 승인 2020.12.15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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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나다운 삶, 나다운 글쓰기‘ 주제로 쓴 글을 추려 싣는다. <편집자 주> 
EBS '딩동댕유치원' 이야기숲 만약에-신데렐라 편 화면 갈무리.
EBS '딩동댕유치원' 이야기숲 만약에-신데렐라 편 화면 갈무리.

[PD저널=최현선 EBS PD] ‘뾰로롱 꼬마마녀. 열두 살 난 마, 마, 마법의 천사.무지갯빛 미소를 당신에게 살짝 뿌려드리겠어요.‘

‘뾰로롱 꼬마마녀’는 휴대폰을 처음 갖게 된 나의 첫 컬러링이었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 열넷의 초가을부터 처음 이력서를 넣는 스물다섯의 봄까지 나의 휴대폰은 ‘K-약정’인 2년 주기로 바뀌었지만, 컬러링만큼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이 길고 긴 12년의 컬러링 역사는 내가 첫 직장에 지원을 하며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바로 어느 방송사의 온라인 프로젝트팀의 계약직으로 합격 통보 문자를 받은 날이었다.

매월 1200원을 내며 10년 이상 유지해온 컬러링이었는데, 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나는 장미칼보다 단호하게 묵은 추억을 잘랐다. 이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동료 직장인들이 ‘뾰로롱 꼬마마녀’ 컬러링을 듣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에서였다.  

뚜-뚜-뚜.. 이제 흔하디흔한 기본 통화연결음만이 나를 향한 통로가 됐다. 나보다 남이 더 많이 듣는 컬러링이지만, ‘뾰로롱 꼬마마녀’라는 단순한 노래는 나의 페르소나였다. 컬러링을 지우는 과정은 나에게 있어 ‘나다움’을 포기하는 사회화의 과정이었다. 

이렇게 보호색을 띄며 착실히 K-사회화 과정을 밟고 있는 내가, 프로듀서 및 직장인이 되어서도 놓지 않은 하나의 가치가 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으로 인해 누군가 함부로 규정되지 않길, 규범을 제공하지 않길. 그것은 바로 ‘성평등’이라는 비교적 포괄적이면서도 어려운 시대적 가치다. 프로그램이라는 굉장히 세속적인 형태에 기획의도와 출연자를 구겨 넣으면서 모호하게나마 잡은, 포기할 수 없는 나의 방향성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시도를 하는 내가 다소 예민하다고 했다. 무조건 사회 관념의 반대편에 서려는 것 또한 오히려 편견일 수 있다는 말에는 나는 반대로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바꿔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어설프게 답했다.  

이런 가치관은 유아어린이국에 발령을 받으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기획의도를 전면에 내세워 어른을 상대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때와는 달리,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은 보다 순수하게, 보다 때 묻지 않은 비유를 통해 주제를 담아야 한다. 

실제 마주한 현실은 더 참혹했다. 방송에 기존 동요를 사용하려니 ‘엄마가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 ‘일을 하는 힘이 쎈 우리 아빠’ 등의 가사가 담겨 있기 일쑤였고, 기존 동서양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공주들은 아름다웠지만 매우 수동적이었다. 굳이 모든 것을 바꿨다. 미니드라마 코너에서는 육아휴직을 써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일하는 엄마를 그렸고, 임금과 시장, 원님은 여성으로 바꾸기도 했다.   

특히 기존 동서양 구전 동화를 시대상을 반영해 현대판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큰 희열을 느꼈다. <신데렐라> 편에서 요정 친구들은 ‘만약에 신데렐라가 요정을 만나지 못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신데렐라는 요정을 만나지 못해 직접 낡은 인형을 꿰맨 옷을 만들어 무도회에 참석한다. 신데렐라의 이상한 옷을 본 왕자는 신데렐라를 외면한다. 신데렐라는 내면을 보지 못하는 왕자에게 실망해 무도회 자체를 즐기다 궁중 의상 디자이너의 눈에 띄어 개성 있는 궁중 대표 의상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백설공주> 편에서는 백설공주가 모르는 사람인 마녀가 주는 독사과를 먹지 않고 현명하게 거절하지만, 타지에 놀러와 들뜬 이웃나라 왕자님이 부주의하게 독사과를 먹어 공주가 직접 ‘하임리히법’으로 왕자를 구출하는 이야기로 각색하는 한편, <방귀쟁이 며느리> 편에서는 한 집의 며느리가 아닌, 방귀로 나라를 구하는 어진 방귀 국가대표의 모습을 담았다. 이 같은 단순하면서도 위트 있는 접근은 아이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뿌듯했다. 

누군가 대본은 작가가 쓰고, 촬영은 카메라 감독이 하고, 음향은 믹싱 감독이, 편집은 편집 감독이 하면 PD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 내 안의 뾰로롱 꼬마마녀를 꺼내어 조금은 세상의 대척점에서 모나게 도전하는 게 PD의 일이 아닐까. 

비록 ‘뾰로롱 꼬마마녀’를 마음속에서 내보냈지만, 언젠가 사라진 마녀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오길,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땐,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마녀가 될 수 있길, 2020년의 겨울 조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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