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도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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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39] 가난의 문법

도로에서 한 남성이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있는 모습. ⓒ뉴시스
도로에서 한 남성이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있는 모습.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흩어 밤하늘을 희뿌옇게 물들이면,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하며 골목길로 사라진다. 저마다 방에서 녹아 내리는 밤이 지나면, 자동차조차 맥없이 미끄러지는 아침이 온다. 카메라가 지각과 사고로 초췌해진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 얼어붙은 박스들 위로 쏟아지는 나지막한 한숨은 그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사막을 건너야 하는 노인들의 절망은 화면으로 중계되지 않는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그들이, 길 위에 쓰러진 연후에야 가난은 주목을 받는다. 다만 언제나 굴절된다. 가난은 거짓이거나, 게으름이거나, 뒤늦은 진실이다. 사실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거나, 젊어서 게으른 결과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제는 이 세상에 없거나. 하지만 여럿이 비슷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때, 조롱들 사이에서도 실패를 강요하는 강고한 세상의 힘을 거들떠보는 명민한 이들이 있다.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폐지 줍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저마다 닮은 삶을 만들어 내는 구조의 무게를 재는 책이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전형적인 ‘45년생 윤영자’의 삶을 서사적으로 전달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병치시키는 방법을 통해 각자 다양한 삶의 경로를 겪었지만 “필연적으로 재활용품 수집이라는 일로 수렴”되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위험한 시도이지만, 때로는 서사가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일 때도 있다.

왜 가난의 ‘문법’일까. 문법은 예외가 있다. 그러나 문법 없는 문장도 없다. 어긋나는 순간을 통해 우리는 문법이 있음을 안다. 가난도 그렇다. 누군가는 가난의 인력을 벗어난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힘의 육중한 무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외는 있지만, 리어카처럼 닮은 삶들을 설명하는 틀의 이름은 ‘문법’일 수밖에 없다. 이 ‘문법’이 있어야 우리는 닮은 가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눈 앞에 펼쳐지듯 묘사된 세계의 가장자리를 훑어나가다 보면, 세상이 외면해 온 진실의 단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업은 노인을 은퇴자로 이해하지만, 복지 정책은 노인을 복지사업의 참여자로 이해하는 상호 모순적인 상황”은 노인 세대를 짓누르는 ‘가난의 문법’의 핵심이다. 고임금 노동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지만, 은퇴한 이들이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방법은 마땅치 않은 나라에서 저임금의 재활용품 수거 노동은 사회가 묵인하는 비공식적이고 유일한 대안이다.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

저자는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재활용품 수거 노동’에 종사하는 노인의 형상을 주조하는 데 다양한 힘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자녀세대로의 부의 이전), 국가의 정책(미흡한 복지), 사회의 이데올로기(자립과 자조)는 자산 없는 노인들을 다시금 노동 시장으로 뛰어들게 만들었고, 도시 당국의 정책, 기업과 소비자의 무책임한 습관은 그 노인들이 재활용품 수거 노동에 주로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재활용품 수거 노동의 가격엔 자비가 없다. 쓸만한 재활용품은 비정기적으로만 발생하고, 수거한 재활용품의 가격의 주도권은 고물상이 쥔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노인들과 경쟁하며 재활용품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가격을 올리기도 어렵다. 낮은 노동 단가는 노동 강도를 배가시킨다. 종일 7~8km의 거리를 왕복하며 재활용품을 수집해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시급이 얼마인지 그간 계산해본 적도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뼈아프다. 누구도 이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가난의 문법’에 노인들이 짓눌리는 동안 사회는 각자도생만을 장려했다. 제도를 바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주문을 외웠다. 시간이 흘러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이전 세대보다 부유한 세대가 노인이 되면 노인 계층의 삶의 지표들은 ‘개선’될 것이라는 저자의 냉소 섞인 전망은 두렵다. 노인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방편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시를 개선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도시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고, 누군가는 그것을 치워야만 한다. “주민은 자기 집 문 앞에 쓰레기와 재활용품이 없으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노인들의 저임금, 미숙련 노동에 도시가 위태롭게 기대고 있다는 현실은 언제든 안온한 ‘무지’를 깨트릴 준비가 되어 있다. 연민, 체념, 안도는 관찰자에게만 가능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관찰자가 아니라 문제의 일부분이다. 묵인의 대가를 나눠 지려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다. 

‘가난한 노인’은 연속적인 ‘가난한 삶’의 한 국면일 뿐이다. 저자가 노인 복지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의 책임이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게 있음을 역설하는 이유다.

동정이나 시혜, 연민으로 이루어지는 기부보다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기초소득을 가질 방법을 고민"하고, 장기적으로는 편안한 은퇴를 보장해주는 방안과, 단기적으로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안을 동시에 고민하길 요청하는 저자의 말을 시작 지점으로 삼아보길 권한다.

일터가 성공하는 사람들이 외우는 자립과 자조의 메아리보다는, 조용히 수많은 삶들을 낙하시키는 ‘문법’의 힘을 주시할 방법이 있기를 바란다. 서로 닮은 가난의 모습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도시를 구원하듯이, 도시를 구원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건 도시에 사는 사람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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