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가 끝나고 난 뒤
상태바
쇼가 끝나고 난 뒤
시끌벅적한 시상식을 마친 후 돌아온 일상은
  • 허항 MBC PD
  • 승인 2021.01.18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허항 MBC PD] 개인적으로 2020년 말과 2021년 초를 매우 다이내믹하게 보냈다. 2020 MBC 가요대제전과 함께 말이다. 코로나로 인해 무관객, 전무대 사전녹화로 진행해야 한다는 초유의 조건 속에 스트레스도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방송은 무사히 나갔고, 2달여 간 쇼를 준비한 과정도 나름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은 예능의 주류 분야는 아니지만, 쇼가 가진 힘은 예나 지금이나 독보적인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원시 시대의 제의가 쇼의 원형이지 않았던가. 쇼는 주술적인 느낌을 받을 만큼 판타지로 가득한 장르다. 준비 과정에서도 눈시릴 정도의 아름다운 무대 레퍼런스들에 마음이 황홀해진 순간들이 많았고, 국내 최정상 가수들이 준비해온 음악들은 귀를 전율케 했었다. 

그 판타지가 워낙 컸었기 때문일까. 가요대제전을 마치고 난 후 1주일을 앓았던 것 같다. 전 무대 사전녹화 방침으로 인해 2박3일간 강행군을 한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단 체력적인 부분만은 아니었다. 판타지가 1월1일 0시 50분에 종료된 후, 갑자기 돌아온 현실에서 내 마음이 휘청거림을 느꼈다. 마치 꿈에 깨어나는 과정에서의 몽롱한 정신상태 같은 것이었다. 판타지에서 내려와 일상에 발을 딛는 과정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내 모든 정신을 하나의 쇼에 쏟아낸 후 느껴지는 허탈감과 우울감도 함께 찾아왔다. 

겨우 마음을 추스를 무렵, 16년간 함께했던 반려견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날, 시외할머님이 운명을 달리하셨다. 판타지에서 일상으로 겨우 연착륙했다고 생각했는데, 급작스럽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현실과 연속으로 마주해야 했다.  

이는 아름다운 이미지들과 아름다운 음악들에 묘하게 취해있던 나를 갑자기 깨우는 얼음물 같은 상황이었다. 정신없이 이틀연속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나니, 쇼는 판타지일지언정 인생은 판타지가 아니라는 걸 또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모든 방송인들, 제작자들, 예술가들도 비슷할까. 어떤 콘텐츠를 만드는 상황에서는 그 제작물이 추구하는 판타지에 빠져 현실을 잠시 잊게 되는 것 같다.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파고들기에는 너무 바쁘기도 하고, 눈 앞에는 참 예쁘고 재미있는 요소들이 연속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이내믹한 판타지의 향연이 끝난 후에는 일종의 공허함 같은 것이 꼭 밀려오곤 한다. 프로그램이 시즌 종료된 후, 혹은 특집쇼가 끝난 후, 몸은 잠시 쉴수있지만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연차가 쌓일수록 그 느낌에 익숙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바탕의 시끌벅적한 쇼가 끝나고 판타지가 지나간 자리에 부쩍 나이 드신 부모님의 얼굴이 보인다.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던 생명체가 떠나가기도 한다. 미래를 위한 재테크에 소홀했던, 혹은 주변 사람 챙김에 소홀했던 나의 한심함이 정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 우울한 현실들을 매일매일 여실히 느끼면서 살 필요는 없다. 인생의 일정 부분은 판타지에 기대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가치관이 나로 하여금 이 길을 선택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직업적 특성상 판타지 안팎으로 들락날락 하는 패턴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처럼 판타지에서 슬픈 현실로 롤러코스터 타듯 급강하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 슬픔은 다시 또 다른 판타지로 잊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