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하우스와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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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와 '접속'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1.02.25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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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접속'
영화 '접속'

[PD저널=박재철 CBS PD] 이연걸의 영화 <황비홍>을 보고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한 친구가 있었다. 졸업하면 중화권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참, 얄팍하다’ 싶어 그때는 듣고 그냥 피식 웃고 말았는데, 돌이켜보면 우리 삶의 중요한 결정들이 우연적으로 혹은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의외다 싶을 정도로 적잖이. 마치 누군가의 주사위 놀이처럼.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나 역시 영화 한 편으로 평생 직업을 골랐다. 취준생으로 긴 터널을 통과할 즈음, 장윤현 감독의 영화 <접속>을 봤다. 잔상이 오래 남는 작품이었다. 영화 속 라디오 PD의 세계는 꽤 근사해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그 영화의 실제 촬영장소였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다. 따져보니 어언 20여 년 가까이 됐다. 

1997년도에 개봉한 <접속>은 음악 프로그램 프로듀서인 동현(한석규)과 홈쇼핑 가이드 수현(전도연)의 러브스토리가 뼈대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할 때 동현과 수현은 사랑의 약자들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각자 목청껏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한 처지인데, 동현은 옛사랑으로, 수현은 짝사랑으로 말 못 할 ‘사랑 통(痛)’을 앓고 있다. 이때 둘을 연결한 매개체가 있었으니 바로 그 당시 유행하던 PC 통신이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틱톡으로 SNS가 진화하는 시대에 PC 통신은 말하자면 단군 같은 시원(始原)의 자리를 차지한다. 

최근에 이 목록에 핫한 브랜드 하나가 등장했다. 클럽하우스다. 새로운 것이 출현하고 사람의 이목을 끌게 되면 부작용과 가능성이라는 논란의 교차로에 늘 서게 되는데, 클럽하우스도 예외는 아니다. 관련 기사들을 쭉 훑어보다가 엉뚱하게도 이런 상상을 해봤다. 영화 <접속>의 두 주인공이 PC 통신이 아닌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선, 동현과 수현은 모두 아이폰을 사용해야 한다. 클럽하우스는 아이폰에서만 활성화된다. 국내 안드로이드폰이 80%가 넘는 점유율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 첫 번째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클럽하우스에 입성하려면 가입자의 초대장을 받아야 한다. 모든 노크에 하우스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장이 흔치 않아 요즘에는 중고나라에서 매매도 된다고 하니 클럽하우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짐작할 만하다. 

입장까지는 어찌어찌했다손 치더라도 서로 말을 붙여보기가 녹록지 않다. 클럽하우스의 방은 말할 자유가 무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방을 운영하고 발언 기회를 부여하는 진행자(moderator)를 정점으로 기회를 얻어 말하는 발화자(speaker), 그리고 그 발언을 듣는 청중(audience)으로 구분된다. 청중의 경우에도 발화자가 팔로워 하지 않는 사람들(others)은 발언 기회를 얻기 힘들다. 그러니 언뜻 수평적으로 보이는 클럽하우스에도 이런 보이지 않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인위적으로 둘만의 방을 만들지 않는 이상, 청중 앞에서 동현이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무람없이 꺼낼까 싶다. 수현 역시,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는 은밀한 연정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클럽하우스는 사적 주제보다는 공적 토픽을 둘러싼 교류의 장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공과 사의 경계가 희미해 보이긴 하지만. 지명도와 화술에 비교 우위가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선망을 발판 삼아 ‘자신의 잘남’을 뽐내는 경연의 장, 그런 SNS의 공간으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기사에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클럽하우스 방에 들어와 화제가 됐다는 대목이 빠짐없이 나온다. 실시간으로 초특급 셀럽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넬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은 확실히 클럽하우스만이 제공할 수 있는 매력 포인트이긴 하다. 

발언이 기록이나 녹음이 안 되고(공식적으로는), 단톡방처럼 나가면 티가 나는 게 아니라서 혹여 동현과 수현 두 사람이 우연히 같은 방에 들어와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나간다면? 동현이 수현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노래 때문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ule eyes.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을 옛 애인에게서 받고선, 수현이 혹 그녀가 아닐까 고대한다. 만약 동현이 클럽하우스 방에서 Pale blue eyes란 곡을 들려준다면 이는 저작권 위반은 아닌 걸까?

활로를 모색하는 오디오 생태계 제작자들에게 클럽하우스는 저작권이라는 족쇄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대안적인 공간이 될까. 유명한 디제이가 엄청난 인원이 모인 방에 들어와 발언권을 얻어 자신의 프로그램을 들려주면서 홍보한다면 이는 가능한 일일까? 흔적이 안 남고 휘발성이 강한 이 사이버 장소의 특성상, 음란성과 혐오성 내용의 노출에도 방어벽은 취약하다. 앞으로 클럽하우스의 영향권이 넓어질수록 대기 순번을 받고 뛰어나가는 용무자 마냥 이런 문제들은 하나둘 논란의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접속’에 대한 열망은 여전하다. 인간은 호모 커뮤니쿠스다. 서로 소통하며 인정받고 위로받아야 두 발로 직립하는 심리적 동물이다. 접속의 수단이 많아지면서 친목과 교류라는 욕망 해소의 방법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쉬워졌고 편해졌고 그래서 잦아졌다. 그러면 더 끈끈해지고 절실해지고 단단해지기도 했을까? 접속의 다양한 방법이 그 강도와 밀도도 높여줬을까?

클럽하우스라는 또 하나의 툴(Tool)이 우리 앞에 당도했을 뿐,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사용자들의 손에 달린 셈이다. 그렇다. 사고는 핸들이 아니라 핸들 잡은 손이 낸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동현과 수현은 PC 통신에서라야 가능했을 법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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