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 그림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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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삶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네덜란드 속담'
소소한 웃음과 감동 깃든 프로그램과 닮아

피터르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1599년 작)
피터르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1599년 작)

[PD저널=이은미 KBS PD] 등장인물만 100명, 동물 50마리가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1미터가 훌쩍 넘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인데, 마치 어린 시절 읽던 ‘윌리를 찾아라’ 같다. 시나리오에 비유하자면 그림 담긴 씬이 126개에 달한다. 500년 전에 유럽의 피터르 브뤼헐이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화가 이름은 생소하지만 한번 보면 이 화가가 그린 그림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시골 마을을 지미짚이나 드론으로 촬영한 것처럼 부감 각도의 그림이다. 어떻게 보면 요즘의 일러스트 그림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떠오른다.

지금은 지상파에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면 일하면서 문화적 허영을 경험할 수 있어 PD로서 행복하다. 그 당시 만나 지금까지 기억하는 그림이 바로 피터르 브뤼헐의 ‘네덜란드 속담’이다. 직관적으로 보면 코믹한데, 더 자세히 보면 이솝 우화처럼 126가지의 속담과 교훈을 담고 있다. 

농어촌을 배경으로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 출연자들을 촬영하고 제작하다보면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과거로 치면 귀족을 모델로 하는 그림이 아니라 21세기형 민화나 풍속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이다.  

무명의 기간을 보내는 연예인도 있지만, 콘텐츠 홍수 시대에 좁은 인력 풀(pool) 속에서 인기 연예인들은 더 바빠졌다. 소수 연예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급증했고, 시청자 입장에서는 매일 마주하는 연예인 출연자들이 겹친다. 어느 프로그램인지 채널도 분간이 안 된다. 프로그램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일반인 출연자들은 새로운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6시 내고향>이나 <유 퀴즈 온 더 블럭>, <맛집의 옆집>, <골목식당> 같이 연예인 사이에 일반인 출연자가 함께하면 방송쟁이가 생각지도 못한 ‘도발’이 생긴다. 

서민들의 모습에서 건지는 코믹한 상황은 소소하지만 자연스럽다. 농담 뒤에는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먹먹한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며칠을 함께하다 보면 정을 내주고, 생면부지 촬영팀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까.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했을까. 웃음과 감동, 교훈이 섞여 있는 서민의 삶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과 중첩된다. 

피터르 브뤼얼의 그림은 작은 마을을 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세상과 삶의 부조리를 담고 있다. 서민들이 출연하는 휴먼다큐나 정보 프로그램도 소소하지만 그 속에는 세상의 부당함과 아이러니의 파편들이 담겨있다. 두 가지는 볼수록 닮은꼴이다. 화려하고 주목받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싶다는 PD의 욕망이 올라올 때마다, 일반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더 큰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지 마음을 다잡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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