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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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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트위터를 자주 본다. 대부분 ‘눈팅’이다. 기억할 만한 현자들의 아포리즘, 시국 현안에 대한 촌철살인 코멘트를 즐겨 읽는다. 화제가 되는 동영상을 가까운 지인과 공유하거나, 요즘 인플루엔서의 세련된 취향을 모방하기도 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 올라온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메모는 평소 즐기던 콘텐츠와는 달리 좀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선생님... 있잖아요오...” (몹시 망설인다) 
“왜? 무슨 일이에요?” (계속 머뭇거리던 꼬마 아이가 귓속말을 한다)
“어제 엄마가 빨간불인데 길을 막 건넜어요! 어떻게 해요?”

나도 건널목 앞에서 그 엄마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옆에 아이들이 서 있었다. 두리번거리다 성큼성큼 발길을 옮기는 나에게 ‘못된 어른’이라는 비난이 아이의 시선에는 실렸을 테고, 그 시선을 난 가볍게 무시했다. ‘못된 어른’이 아이에게 어른 누구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단 한 사람, 엄마가 된다면 어렵다. 목격의 순간, 아이의 마음은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잠시 그 아이가 되어본다. 

1) 선생님을 찾아가기까지의 혼란과 번민 
2) 선생님 앞에서도 말할까 말까를 끝끝내 망설이다
3) 결국 공개적인 폭로 방식을 포기하고 귓속말로 엄마의 과오를 밝힌다.

아이의 심리적 고통은 계단에 걸쳐진 그림자처럼 한 칸 한 칸 올라가며 넓고 크게 번져 나갔을 것이고, 평평했던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이스트처럼 잔잔했던 아이의 내면을 걱정과 근심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을 터다. 아이 나름의 절박함은 마지막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해요? (저는...)”

선생님은 따끔한 당부로 자신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했다.

“어른 여러분! 여러분의 교통법규 위반이 아이들에게 정신적 타격과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아이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그간 나의 행동을 반성해보다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른다. 삶이 힘든 건 결국 이런저런 날카로운 갈등 상황에서의 선택의 무게 때문일 텐데, 그동안 내 어리석은 선택들에 비춰보면 이 아이는 썩 지혜로웠다고.

“멈출까, 더 갈까?”, “해볼까, 그만둘까?”, “밝힐까, 감출까?” 양쪽을 땀나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지친 마음은 그만 권위에, 때론 힘에 기대, 한쪽 그루터기에 덜컥 주저앉아 버린다. 갈팡질팡의 수고스러움을 좀 더 견뎌냈다면 혹여 찾을 수도 있었을 묘수를 포기하고선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엄마의 잘못을 감추지 않고 외화는 시키되, 그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갈등 상황을 매듭지은 셈이다. 나름의 절충안을 찾은 것이다. 아이가 선택한 의사소통 방식인 ‘귓속말’로. 

귓속말은 상대를 부드럽게 내 편으로 만드는 친절한 고백의 형식이자, 상황의 악화와 확대를 염려하고 차단하고픈 간절한 마음의 전달이다. 대개 아이들이 부끄러움 때문에 하는 귓속말이 엄마의 나쁜 행동을 선생님에게 알리는 순간에는 관용과 용서를 이끌어내는 표현 방식이 된 것이다.

“버텨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주 하고 자주 듣게 되는 이 말. 세상 안팎에서 들려오는 이 주문이, 씨름 선수처럼 밀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견뎌내라는 수동적인 해석을 넘어서 윤리적 선택의 기로에서 한쪽으로 쉬이 기울지 말고 좀 더 갈등하고 고민해보라는,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보라는 능동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다. 

트위터에 남긴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 일화가 나에겐 ‘버티다’의 사전적 의미에 새로운 풀이 하나를 더 추가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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