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를 닮은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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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44] '개소리에 대하여'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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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해외에서 보는 한강 사건에 대한 의견은 “타살”에 무게>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높아진 국격을 체감하려던 찰나 기사는 삭제되었다. 글에 언급된 전문가들이 실은 버추얼 유튜버와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이었다는 사실이 금세 들통났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장난스런 게시물을, 사실 확인조차 없이 긁어서 만든 기사의 흔한 운명이었다. 

허무맹랑한 내용조차 확인하지 않는 소홀함을 마주하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그들은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정작 진리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관심을 끌었다가 논란이 되면 은근슬쩍 기사를 내려버리는 이들이다. 형태만 기사일 뿐 내용 없는 글이 양산되는 모습은 소홀함이 장사의 수단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이런 기사는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속 개소리와 닮았다. 그는 책에서 개소리를 사태의 진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말이라 본다.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고, 진실을 두려워한다. 개소리를 일삼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진실한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진실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그가 보기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위험하다. 진실은 거짓말쟁이를 침묵시키지만, 개소리를 일삼는 이에겐 소용이 없다. 게다가 우리는 일상에서 개소리를 어느 정도는 하고 있기에 거짓말보다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거짓말은 자신을 진실의 자리에 대치하려는 날카로운 초점을 가진 행위지만, 개소리는 방향이 없다. 단지 즐기는 행위이기에 더욱 제거하기 어렵다. 

프리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프리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아니면 말고’ 식의 발화는 그 점에서 개소리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터무니없는 소리지만, 어쩌면 진실일 수도 있다며 음모를 제시하는 이들의 발화 형태를 닮았다. 그것이 경제적 의도에 의한 것이든,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든 상관없다. 진실에 대해 냉소적이고, 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의견끼리 맞붙여 정확하게 진실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카리스마적 ‘개소리쟁이’의 ‘사이다 발언’에 열광하는 목소리에 지워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 주제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태도가 민주주의 시민의 덕성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이젠 개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저마다 영향력을 가진 매체를 손쉽게 얻는다. 그들은 자신의 진술이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데 관심이 없거나 진작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대신 자기 자신의 진정성만 확신한다. 다양한 관점이 아니라 저마다의 진정성만이 남는다.

침묵을 절박하게 요청할 때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배양하기를 요청한다. 모르는 문제는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의심하는 태도를 민주주의 시민의 덕목으로 포함시키길 바란다. 분별력 있는 시민을 길러내야 민주주의는 개소리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별력 있는 시민은 까다롭고, 환영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편도선 수술을 하고 온 과외 교사가 “마치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에요”라며 자신의 아픔을 표현했을 때, 정색하며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 지 알 수 없”다며 대꾸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누가 환영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내뱉은 말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걸 알 도리가 있는지 장인 정신을 가지고 접근하기를 프랭크퍼트는 요청한다. 모두가 그럴 수 없다면, 책임 있게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언제나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운명이 걸린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논할 때 만이라도 서로는 ‘말의 장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제는 도덕적 요청이 지닌 한계다. 기꺼이 이 요청을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그들은 개소리를 하나의 놀이로 즐긴다.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만약 진짜라면 어찌할 것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이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절대자의 언어를 들여올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침묵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단적 회의주의와 절대자의 언어 사이에서 우리는 근거 없는 합의의 허무함을 견뎌야 한다. 

언론이 거대한 개소리의 파도 속에서 또 하나의 개소리를 덧붙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칼날이 될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나날이다. 어처구니 없는 헤드라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비관적 전망에 기울면서도, 어딘가에서 ‘자부도 체념도 없이’ 장인 정신으로 자신의 말과 글을 다듬는 이들을 마주하며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는다. 견디어 내는 삶들이 나를 견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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