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유혹에 휩싸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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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저작권보호원 홈페이지 화면 캡쳐.
저작권보호원 홈페이지 화면 캡쳐.

[PD저널=박재철 CBS PD] 며칠 전, 시민들이 제작한 오디오 콘텐츠 공모전 심사에 갔다. 여러 출품작 중에 “아, 이건 공중파에서도 해볼 만하다” 싶은 작품이 눈에 띄었다.

<남남북녀, 북남남녀>이라는 이름의 이 라디오 다큐는 탈북 남녀와 가정을 이룬 우리나라 두 커플의 생활상을 교차해 보여주었다. 공존의 현장을 남북 가정으로 잡았던 착상 못지않게, 성실한 취재와 밀도 있는 구성이 돋보였다. ‘다름’에 대한 어떤 태도가 우리를 ‘바름’으로 이끌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작은 계기였다.

일상에서 출발해야 기획은 구체성을 얻는다. 별다른 이견 없이 1등으로 선정을 하면서 한편에서는 다른 류의 갈등이 생겼다. 나중에라도 이 주제로 제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 그럴 때 “이 출품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동의를 구해야 하나?” “아이디어만 취한다면 굳이 알릴 필요까지 있을까?” “큰 반향도 없을 소재 아닌가?” “지역, 인종, 성별 등 공존의 해법을 찾는 여러 케이스들과 이 다큐의 사례를 함께 묶는다면 오히려 새로운 기획이지 않나?” 줄 이은 자문(自問)들이 마음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기시감처럼 사건 하나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십 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한 소설가가 신춘문예 응모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 물론 그 소설가는 심사에 참여했다. “맛보는, 거짓말하는, 사랑하는 혀”라는 모티브,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은 “그 혀를 요리해 먹는다”는 설정이 같아서 생긴 의혹이었다. 문단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다툼이 커졌고 응모자 역시 책을 출간해 표절 여부를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으로 논란은 갈무리 됐다. 

독창적이고 흡인력 있는 아이디어에 목마른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런 심사의 자리가 윤리적 갈등의 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평가자인 자신의 위치를 잊고 순식간에 향유자 자리에 앉힐 만큼 매혹적인 출품작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눈치채지 못한다면, 내 안의 죄책감을 감출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냥 스윽 훔치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인 소재나 창의적인 기법, 유려하고 기발한 표현들에 어찌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남의 일에는 정확해지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나의 일에는 그 정확함이 무뎌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아닌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가 바로 ‘표절’이다. 통째든, 부분이든. “표절은 범죄다!” 이 단순한 원칙이 복잡한 현실계에는 종종 무력해지곤 한다. 

어느 카피 라이터는 이야기한다.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물이건 관념이건 아버지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요. 그러니 베끼세요. 단, 아무런 표도 나지 않게 베끼세요. 누가 보아도 이것이 저것을 베꼈다는 실마리조차 발견하기 어려울 때 그것은 실로 행복한 표절입니다.” <카피는 거시기다> -윤준호 

증거 인멸 정도로 재구성하라는 주문인데, 이것은 표절의 손쉬움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수긍이 가는 말인데도 이런 정도라면 창작의 고통을 택하는 쪽이 생길 법하다. 베끼는 일에 대해, 표절과 창작의 경계선에 대해 뾰족한 해법은 풀 섶에서 바늘 찾기다. 

다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 앞에서 상식은 놓치지 말자고 내심 다독인다. 해체와 재구성할 정도가 아니라면, 원작의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없다면 “묻자!” 초등학교 시절 옆자리 짝꿍에게 연필이나 지우개를 빌려도 건네는 질문, “나, 이거 써도 돼?” 

묻는 순간, 고민의 공은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그 고민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일단은 홀가분. 묻고 그쪽에서 안 된다고 한다면? 그때는 원작자를 작업에 참여시키거나 유무형의 지분을 나누는 수순이 가능할 테다. 명예든 돈이든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려니 생기는 게 표절이 아닐까 싶다. 일단 고민의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심사를 마치고 1등을 한 참가자의 연락처를 확인해 전화기에 저장하면서 공모장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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