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직업과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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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직업과 기본소득
[비필독도서 50] '불쉿 잡'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1.12.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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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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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다른 사람이라면 발표하지 않을 만한 도발적인 글을 써 둔 게 혹시 없나요?” 2012년 11월에 창간한 영국의 잡지사 <Stirke!>의 편집자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에게 기고문을 의뢰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정치적 목소리를 활발하게 낸 여파로 재직하던 대학에서 해고당한 후 “학술적 망명” 상태였던 그는 이 청탁에 “어떤 직감”을 바탕으로 한 편의 글을 답으로 써 보냈다. 그 글은 신생 잡지사의 홈페이지를 마비시켰고, 순식간에 수많은 언어들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불쉿 잡>의 씨앗이 된 <헛된 직업 현상에 대하여>였다.

이 글에서 그는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노동에 할애하고 있고, 심지어 그 중 상당한 시간을 “내심으로는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는 데 허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엔 경제적 이유보다는 “행복하고 생산적이며 여유 시간도 누리는 인구”가 치명적으로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지배계급의 정치적 동기가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단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런 일자리들을 ‘헛된 직업’(bullshit jobs)이라 부르는 그는,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겪는 정신적 폭력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 글이 잡지에 게재된 후, 수많은 사람들의 자기 고백이 그에게 쇄도했다. 자신의 직업이 무의미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의 사연은 그가 <불쉿 잡>이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만연하지만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현상에 대해 조금 더 정교하게 다뤄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레이버는 <불쉿 잡>에서 이전 에세이에선 거칠게 정리했던 헛된 직업의 정의를 다듬고 그 유형들을 정리한 후, 이 직업들을 양산한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의 모습을 탐구한다. 그 속에서 왜 사람들은 이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는지, 이런 부당한 상황은 어째서 지속되는지를 개인의 심리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에서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짤막하게 대안을 제시한다. 

그가 내리는 ‘헛된 직업’의 정의에는 노동자가 자기의 일에 대해 가지는 주관적 인식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유급 고용직”인 동시에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이며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 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껴야만 한다. 문제는 직업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불쉿 잡'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불쉿 잡'

그레이버는 이 책의 목표가 “사회적 효용성이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거나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사회적 효용이나 사회적 가치가 없다고 내심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는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라 답한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근사치’가 노동자의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논쟁거리지만, 그 덕에 직관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이 ‘헛된 직업’임을 간파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이 정의를 바탕으로 헛된 직업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제복 입은 하인’, 누군가 채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격적 요소가 있는 직업의 종사자들인 ‘깡패’,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임시 땜질꾼’,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용된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업무를 배당하기만 하거나 불필요한 업무를 생산해내는 ‘작업반장’이다. 이 다섯 가지의 유형은 중첩되기도 하고, 특정 직업에 편중되기도 한다. 

저자는 노동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헛된 직업들이 급등하고 있으며, 그 근저에는 금융자본주의의 성장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행정직, 컨설턴트, 사무직, 회계직원, IT전문직과 같은 직업이 195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이 일자리들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일자리라기보다 다양한 부채 형태를 창조하고 거래하며 발생하는 이윤을 복잡한 방식으로 배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레이버가 보기에 이는 수탈한 지대를 계층화된 관리직에 재분배하는 데 치중했던 중세 봉건제의 형태를 닮았다. ‘경영적 봉건주의’는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지대 추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어째서 그동안 공격받지 않았을까? 그의 대답은 중세 북부 유럽의 생활 주기 서비스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생의 일부분을 반드시 다른 사람 아래에서 유급노동을 하며 보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유급노동은 성장을 의미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장인이 될 수 있었고, 가정을 꾸리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등장하며 길드를 와해시켰고, 직인들은 장인, 곧 어른이 될 기회를 영구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목표를 상실한 이들을 고용하게 된 신흥 중산층은 이 프롤레타리아의 ‘건방진’ 매너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노동은 고통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수련의 과정이자 구원의 도구라는 신학적 이데올로기와, 자본에 이윤을 집중함으로써 얻는 저가의 상품을 ‘소비’하여 행복할 수 있다는 소비자주의는 노동자들을 옥죄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와 목적을 상실해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에 대한 감각과 자존감을, 생계를 위한 노동을 통해 회복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 ‘현대 노동의 패러독스’를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을 전도시킨다. “우리가 일터에서 겪는 고통이 은밀한 소비자적 쾌락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괴상한 사도마조히즘적 변증법”이 탄생한다. 

신지혜 기본소득당 상임대표와 용혜인 의원, 오태양 미래당 대표 등이 지난 9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동의 청원 시작을 알리며 대국민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뉴시스
신지혜 기본소득당 상임대표와 용혜인 의원, 오태양 미래당 대표 등이 지난 9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동의 청원 시작을 알리며 대국민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뉴시스

저자 스스로도 정책을 추천하는 일을 선호하지 않고, 이 책이 “특정한 해결책” 대신 “거의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지 깨닫지도 못하는 문제”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대안을 언급하는 부분은 짤막하다. 그는 정교하진 않지만 생계와 노동의 궁극적 분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보편적 기본 소득’을 언급한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제안을 하기보다, 이 정치적 대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대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펼쳐 놓은 흥미로운 지적 여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독자들의 몫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일은 반드시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고통스러운 일을 해내는 것은 정말로 도덕적인가? 이것은 혹시 고통스러운 일을 벗어날 도리가 없는 이들이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꾸며내는 환상은 아닌가? 자신의 일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때로는 해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독자라면, 저자가 짤막하게 남겨 놓은 결말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덧대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언어를 가지게 되기를, 저자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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