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자들은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장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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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자들은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장악했나
[비필독도서 51] '한낮의 어둠'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2.01.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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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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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파시즘은 대중으로 하여금 결코 그들의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구원책을 찾고자 한다. 대중은 소유관계의 변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그대로 보존한 채 그들에게 표현을 제공하려고 한다. 파시즘이 정치적 삶의 심미화로 치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1936년 발표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대중예술에 내포된 가능성과 위험성을 진단했다. 복제 기술의 발달은 영화와 같은 강력한 매체를 통해 혁명적 인식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934년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의지의 승리>는 '타락'의 전형적 사례다. 히틀러는 영화의 가능성을 빠르게 간파해, 그 기술을 선취해 대중 동원을 위한 스펙터클을 생산했다. 우리는 그 참혹한 결과를 안다.

프랭클린 포어의 <생각을 빼앗긴 세계>에는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대 테크기업이 공유하는 순진한 기술 낙관주의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테크놀로지를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도구로 보는 순진한 시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들이 만들어 낸 소셜 미디어는 탈출구 없는 거대한 반향실(反響室)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을 재빠르게 포착한 극단주의자들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대중 동원을 위한 스펙터클을 생산하고 있다.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되는가.

오스트리아의 반(反)극단주의 활동가이자 연구자인 율리아 에브너는 극단주의자들이 소셜 미디어와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전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영향력을 발휘해 현실 정치를 뒤틀고 있다는 비판적인 글을 <가디언>에 게재한 후 직장을 잃었다. 이 경험은 그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극단주의 집단에 잠입해 장기간의 취재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극단주의 운동은 단순히 소셜 미디어 안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위협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벌어진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는 그들의 동학을 수수께끼로 남겨둘 수만은 없게끔 만들었다.

율리아 에브너의 '한낮의 어둠'
율리아 에브너의 '한낮의 어둠'

그동안 블랙박스로 남아 있던 극단화의 동학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다섯 개의 가짜 정체성을 활용해 열 두개의 극단주의 집단에 잠입했다. 그가 가입해 활동한 집단은 서로 겹치는 게 별로 없을 정도로 넒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백인우월주의자, 지하디스트 여성 모임, 네오 나치와 같이 이들은 이념적 지향도 다르고, 때로는 서로가 공격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위험을 무릅쓴 취재를 진행하면서 에브너는 이들이 동일한 급진화 동학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급진화의 동학을 여섯 단계로 구분한다. 가장 먼저 이들은 소셜 미디어와 같이 손쉽게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들의 이념에 공감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모집한다. 그 과정에서 지향점에 따라 유전자 검사, 설문지와 같은 수단들이 쓰인다.

사람들이 모이면 각 집단의 리더는 서브컬쳐나 밈, 음모론과 같은 소재를 통해 구성원들만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때로는 그들만 공유하는 고유한 언어를 만들고, 내부자만 알 수 있는 농담을 확산시키기도 한다. 구성원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직에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소셜 미디어는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집단을 고립에서 구원한다. 극단주의자들의 언어는 이제 세계에 동시중계된다. 1960년대 유나바머의 사상은 미국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지만, 이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모스크에서 총기를 난사한 테러리스트의 헛소리는 그의 이마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밈, 풍자적 콘텐츠를 활용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이 헛소리가 비판적 목소리를 뒤덮고 공론장을 점거하도록 만든다. 실제 규모에 비해 거대하게 느껴지는 여론의 환상이 이렇게 완성된다.

오늘날 극단주의 운동은 이렇게 사회화되고 연결된 대중과 '순교자'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확산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텔레그램, 디스코드와 같은 기술들은 빠르게 그들이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게 만들었고, 테러, 해킹 캠페인, 독싱(개인 정보 유출)과 같은 방식으로 전통적 언론인들과 현실 정치인들을 침묵시켰다.

동시에 세련된 언어와 복식을 활용해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침투하려 시도하고, 이들에 영합하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테러의 시대에 도달했다.

모집, 사회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킹, 동원, 공격이라는 급진화 동학의 여섯 단계를 분석한 후 저자는 점차 커지는 극단주의 운동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기술적 측면의 규제와 함께 사회적 차원의 대안도 실시하길 요청한다. 대형 기업들의 자발적인 자정작용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의 추천 알고리즘을 좀 더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미디어 독해력 교육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정보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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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스러울만큼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 운동이 지난 세기 “인권 운동이 이룬 가장 큰 성취”를 무너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절박함은 저자로 하여금 자신과 주변인의 신변에 위협이 닥칠 가능성을 무릅쓰고 장기간의 취재에 나서게 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도전적인 접근이다.

취재 과정에서 저자가 극단주의자들의 언어에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는 사실은 급진화의 동학이 가진 강력한 힘을 방증한다. 견뎌내기 어려운 장기간의 잠입 취재가 짧은 체험에 기반한 기사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관심을 보이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들을 진단하는 부분은 비교적 빈약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주의의 주변에 머무르도록 하는가? 무엇이 사람들을 경제적·사회적 고립의 상태에 놓이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들이 가장 극단주의의 언어에 취약한가?

증상의 원인이 불명료하면, 치료법 역시 대증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여전히 당위에만 머물러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저자의 한계라기보다는, 신기술에 내재된 혁명적 가능성을 한발 앞서 전유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뒤처져 있는 우리들 모두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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