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샘 자극한 영화 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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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컷.
영화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컷.

[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진행] 남자가 춤을 춘다. 제자들의 졸업식 날, 학생들의 밝은 얼굴과 세찬 환성을 등에 업고 남자가 춤을 춘다. 

그 남자 마르틴은 동료 교사이자 친구인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와 함께 실험을 했다. 인간의 혈중 알콜 농도가 0.05 퍼센트로 유지 되어야 한다는 어느 학자의 이론을 이야기하다가 직접 실험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실험이 시작되고 친구들은 삶의 활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뭔가 확 바뀐 수업 방식에 학생들도 관심과 재미를 보이고 스스로도 용기와 느긋함을 얻은 듯하다.  

하지만 알콜에 의존하는 것은 결국 미봉책일 뿐. 어느 순간을 지나면서 늘 취해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는 상황을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톰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마르틴에게 어떤 기폭제가 되었을까. 오래 전 젊디젊은 시절에 재즈 댄스를 배웠다는 마르틴은 내내 춤 동작 하나 보여주지 않더니 마치 마음이 폭발한 듯 갑자기 춤을 춘다. 멋진 동작으로 그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이 거리를 무대 삼아 춤을 춘다. 그런데 나는 왜 마르틴의 춤이 그토록 슬펐을까.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왜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듯하다. 여자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다가 금세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른다. 

그 여자 프랑스 드뫼르는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스타 앵커이다.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입맛에 맞춰 정치가에게 질문을 하고 궁지로 몰아넣고 순진한 표정으로 수습을 하고 스튜디오를 쥐락펴락 한다. 그런가하면 분쟁지역을 직접 취재하며 생생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폭격이 난무하고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지만 개의치 않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프랑스의 모습은 용감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프랑스는 크게 두 측면에서 보여 진다. 뉴스채널의 간판스타로서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하고 스튜디오로 돌아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프랑스, 그리고 일상의 어긋남과 불특정 다수인 대중의 변덕스러운 입맛에 어쩔 줄 모르는 프랑스. 언뜻 프랑스가 시도 때도 없이 흘리는 눈물이 당혹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의 입장에 조금만 이입을 한다면 그 눈물이 마음에 와 박힌다. 

남자는 페허가 된 도시의 어느 모퉁이에서 피아노를 친다. 위험하기 짝이 없고 바로 곁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있지만 남자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달리고 남자의 눈은 건반에 고정되어 있다. 

그 남자 카림은 위험한 이 지역을 벗어나고자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은 피아노를 수리해 팔려고 하지만 피난처에 들이닥친 무장군인들은 숨겨 놓은 피아노를 발견하고 총으로 쏴 버리고 피아노를 팔아 망명하려던 카림의 희망이 위태로워진다. 

카림은 피아노를 수리하기 위해서 부품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람자에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부품을 찾아 와 수리를 마친 피아노를 카림은 폐허 속에서 총격전 속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도발이며 유인작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거침없이 내달리는 카림의 ‘발트슈타인’ 1악장은 미움이니 슬픔이니 희망이니 하는 생각조차 멈춰버릴 만큼 뭉클하고 강렬하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마르틴이 춤을 출 때 그의 춤이 슬프게 느껴진 건, 그 이후 마르틴(과 친구들)의 일상이 슬며시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이후는 어디서건 톰뮈의 부재가 느껴질 것이고 더 이상 ‘혈중알콜농도’ 실험을 계속하는 것도 무모하고 서서히 생겨난 관계들의 균열과 퇴색한 일상의 파편들을 다시 이어 붙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에 와 있는 그들이기에.

영화 '프랑스' 스틸컷.
영화 '프랑스' 스틸컷.

영화 <프랑스>의 프랑스 드뫼르는 또 어떤가. 대중이 바라보는 스타로서의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와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 버리는 대중의 매몰참, 논픽션이어야 하지만 촬영 과정에서의 연출과 편집 과정에서의 의도가 일종의 픽션을 만들어내는 상황들이 미세하게 지속적으로 프랑스의 마음에 균열을 불러오지는 않았을까. 

영화 <전장의 피아니스트>의 카림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폐허가 된 마을, 긴장감이 감도는 마을에서 피아노를 고쳐 팔겠다는 카림이 이기적으로 비칠까 아니면 희망을 버리지 않는 반짝임으로 느껴질까. 오직 피아노를 향한 카림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참혹한 현실과 직면할 때 당신은 희망을 말할까 아니면 참혹한 현실을 말할까. 

어쩌면 카림의 여정은 쉽게 동의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부품을 구해 수리를 마치고 판매까지 완료한 상황에서 결국은 자기의 피아노를 내놓고 연주를 하는 카림에게는 아무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카림의 모습은 오직 음악과 자신만 존재하는 몰입을 보여주는데 왜 이리 뭉클한지. 

생각해보니 슬픔이라는 것은 스펙트럼이 넓은 감정이다. 슬픔은 순간적이지 않다. 지속적인 상태이다. 슬픔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공감되고 옮겨질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1차적인 슬픔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내면에 들어찬 슬픔은 알아챌 수 없기도 하다. 그 슬픔들이 일상에 켜켜이 섞이고 쌓일 때 어느 순간 돌아보면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근래 연이어 본 세 편의 영화가 나에게 이런 슬픔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이제 그런 미세한 종류의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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