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저게 한국이 맞아? 애플TV가 공개한 드라마 <파친코>를 본 많은 시청자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특히 드라마가 재현해낸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장면들이 그렇다. 부산 영도의 항구를 부감으로 따라가며 찍은 장면이 일단 압도적으로 시선을 잡아끌고, 그 곳 어시장에서 수산물을 파는 조선인들의 활기찬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세트 촬영에 CG를 더해 완성했을 그 장면은 분명 당대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풍광을 담고 있지만, 어딘가 지금까지 <여명의 눈동자>나 <미스터 션샤인> 같은 드라마 에서 봤던 장면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고 있는 걸까.
선자네 하숙집에 기거하는 노동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막걸리 한 사발과 우렁차게 함께 부르는 ‘뱃놀이’ 한 자락으로 풀어내는 대목은 첫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우리가 잃었거나 잊고 있었던 옛 조상들의 여러 면면들이 묻어나는 명장면이다. 어두워져 밤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에 흥과 한이 더해져 터져 나오는 노랫가락은,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으로 들어온 시대와 그럼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고 이 어둠조차 버텨낼 조선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은유한다.
이들의 노래는 그래서 술기운에 흥을 빌려오지만 나라 잃은 민초들의 한과 슬픔이 묻어난다. 그런데 이 장면 속에서 당시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하다. 이들은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고 또 일제의 폭력이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도리’나 ‘삶의 지혜’를 분명히 가진 자존감 넘치는 모습이다.
이러한 시선은 선자(김민하)라는 인물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일본 순사들이 어시장에 나타나면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 선자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장면도 그렇고, 한수(이민호)라는 돈 많은 어시장 중개인 앞에서도 결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모습도 그렇다.
결국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그 격동기에 일본, 미국으로 떠돌며 생존해낼 수밖에 없었던 이민자들(재일동포, 재미동포 같은)의 삶을 다루면서,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어디서 근원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그 근원을 보여주는 첫 회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중요하다. 그들은 이 작품 속에서 한마디로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어도 문화적 자존감이 높은 당당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파친코>의 이런 시선은 당대의 풍광을 담아낸 영상 안에서도 드러난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선자네 하숙집 풍광을 찍는 영상의 색감에서는 ‘빈티지’가 느껴진다. 그저 낡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가치’가 더해진 듯한 색감. 거기에는 이 드라마를 만든 이들의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있다. 가난해도 넉넉한 상을 내줄 정도로 정이 넘치고, 막걸리 한 잔과 노래 한 자락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풀리던 당대의 삶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 달까.
이것은 이 작품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지만, 격동기로 인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이민자들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어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 작품은 소설 원작을 쓴 이민진 작가, 이를 각색한 수 휴, 감독을 맡은 코고나다, 저스틴 전이 모두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래서인지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을 담는 방식에 있어서 더 깊은 애정이 담겨 있고 이들을 핍박한 일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 폭력을 폭로한다.
사실 <여명의 눈동자>(1991)처럼 일제의 폭력을 과감하게 다룬 작품들은 최근 들어서는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미스터 션샤인>도 물론 일제와 맞서는 의병을 그리긴 했지만 그 강도는 그리 높진 않다.
최근 한류드라마들이 글로벌 시장에 나가게 되면서 중국과 일본 등 근접 국가들의 시청층을 고려하고, 지나친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겹쳐지면서 생긴 경향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경계인의 시선이 담김으로써 보다 과감하게 일제강점기를 그릴 수 있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개발시대를 거치며 점점 잊고, 잃고 있었던 당당한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을 복원해냈다는 건 이 경계인의 시선이 찾아낸 최대의 수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