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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을 그리며

세상이 험악할수록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많이 팔리고, 지금 독서계도 그렇다고 들린다. 처세술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형편을 헤아리고 희생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거나 인간으로의 도리보다 인간을 정략적 도구로 이해하고 합리나 이성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권모술수가 그 본질이 아니던가. 확실히 지금 주변을 되돌아보면 큰 목소리와 행동만 있고 낮은 목소리와 실천은 보이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화두는 개혁이고 개혁은 시끄러운 법이니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일까. 그렇다고 이 땅의 정치파행의 시조인 이승만을 국부라고 추켜세우고, 지금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모순을 잉태한 박정희를 이 땅의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함부로 얘기해도 되는 것일까. 「세계는 지금」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기아, 전쟁,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계인들을 목격했다. 인간은 남의 고통에서 자신의 행운을 안도하는 법인데, 내겐 그들의 절망 속에 가려진 행복이 오히려 경이로웠다. 그것은 만불 국민소득 국가의 개인과 겨우 몇백불 짜리 개인을 대비하는 일이 아니었다. 초근목피라도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하는 단란한 식사, 문명의 이기가 없어도 불편하게 느끼기보다 자연을 즐기며 사는 환한 웃음과 또 다른 여유. 오히려 문명 속의 개인들은 나와 내 가족의 더 많은 혜택을 보장받고 더 크고 화려한 권력과 금력을 향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구나. 그래서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불안, 욕심만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구나.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생의 목적은 결국 삶의 질과 행복일 것이다. (우리 프로듀서의 사명이 ‘좋은 프로그램’ 만들기이듯이) 그래서 IMF 구조조정이 신자유주의에 휘둘려서도, 개혁이 잘난 몇 사람들의 권력욕에 이용당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그것은 ‘인간’이란 영원하고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까. 그리고 긴 호흡을 가진 역사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이번이 마지막 기명 칼럼이다. 1년간 이 칼럼을 써오면서 가능하면 내 자신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싶었다. 모두가 마음을 닫고 ‘타인화’되어가는 오늘이, 자신의 대들보 흠집보다 상대방의 눈썹크기 잘못을 씹는 세태가 두렵고 무서웠다. 많은 비판과 격려가 있었지만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한 것은 ‘공자님 말씀’이란 질타였다. 그 얘기도 몇 번 들어서 이젠 익숙해졌지만, 이젠 내 스스로 ‘원칙론은 인정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함’ 정도로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문득문득 촌놈을 그리워하곤 했다. 화려하기보다 평범한, 높은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의,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는, 세상 흐름에 약삭빠르기보다 우직스럽게 원칙에 충실하는, 무리 짓지 않고도 혼자 당당할 수 있는, 손해를 보고도 껄껄 웃을 줄 아는 그런 촌놈을. 이제 칼럼을 닫는다. 칼럼을 마무리한다는 건 1년간 맡았던 직무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새삼 지난 일을 얘기하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는 일부터 하고 싶다. 그리고 진정한 ‘말’과 ‘글’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고민할 것이다. 관심을 가져 주셨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 며칠 전 ‘평상심’이란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 한 후배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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