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큼 트로피 든 윤여정...뜻밖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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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 날 52]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윤여정이 27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코다'(CODA)의 배우 트로이 코처에게 남우 조연상을 시상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윤여정이 27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코다'(CODA)의 배우 트로이 코처에게 남우 조연상을 시상하고 있다.

[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한 장면. 시상자로 나선 그녀는 봉투를 열어 수상자를 확인한 후 큰 숨을 몰아 쉬더니 ‘냉큼’ 수어로 말했다. 수어의 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참석자들은 알아챘다. 객석에서 “오 마이 갓!” 환호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시상식의 오랜 역사상, 수상자를 수어로 호명하는 것 자체가 충격이겠거니와 통역을 거치지 않고 청각장애인 수상자가 먼저 본인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시상자의 배려가 전해진 감동적인 순간이다.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는 <코다>라는 작품으로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트로이 코처가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받고 인사를 하는 와중에 그녀는 또다시 트로이 코처의 트로피를 ‘냉큼’ 빼앗다시피 들었다. 단순히 그 장면만 보면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보는 이가 당혹스럽겠지만 그 당혹스러움은 3초 후 무안함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청각장애인 수상자가 수어로 소감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 해 준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한국 배우 윤여정 씨가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나선 장면이다. 수상자를 발표하고, 트로피를 건네었다가 다시 ‘빼앗다시피’한 동선을 보며, 나는 ‘냉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냉큼, ‘머뭇거리거나 시간을 끌지 않고 재빨리’라는 뜻의 부사는 솔직히 품격 있거나 격조 높은 표현에 인용되는 단어는 아니었다. 본래 의미와 다르게 가벼움 속에 하대 받던 단어가 하필, 그 장면에서 떠오른 것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윤여정 씨의 깊은 사유와 빠른 판단력, 인류애적인 거룩한 행보에 ‘냉큼’이라는 단어가 ‘냉큼’ 떠올랐던 것은 ‘냉큼’의 새로운 성찰이자 영역의 확장인 셈이다.

우리는 빛이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하나로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하나로 모두 알수 있는 우리는
(송창식 노래 / 우리는 가사 일부)

윤여정 씨의 오스카 시상 과정을 방영한 <뜻밖의 여정>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속 깊은 세정을 다시 짚어볼 수 있었다. 지난 202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씨는 당시에 재치 있고 겸손한 수상 소감으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전년도 수상자가 다음 해 시상식의 시상자로 나서는 관례에 따라 윤여정 씨가 다시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한 것인데, 재주 많은 나영석 PD가 “아카데미 시상식 궁금했다.”며 프로그램을 제작한 덕에 일요일 오후 10시 50분부터 흔치 않게 본방사수의 충성심을 과시했다. 사실은 나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무지 궁금했었다. 딱 시청자의 관심사를 저격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영석, 윤여정, 이서진의 라인을 좋아하는지라 동행하는 기분으로 부담 없이 LA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맛있는 것도 상상으로 먹어보고, 아카데미와 영화 관련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윤여정 씨 본인이 영어에 취약하다는 겸손에도 불구하고 적확한 표현과 위트 있는 어휘 구사에 감탄하면서 노배우의 인생관, 철학, 관록에 감동했다.

아카데상 시상식 준비를 하면서 후보들의 이름을 외우고 특히 청각장애인 배우를 위한 수화를 자발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 많은 한국 할머니의 배려심에 뭉클했다. 고백컨대, 윤여정 씨가 트로이 코처를 지명하기 위해 수어로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혹시 아카데미 측에서 수상자를 미리 귀띔해서 윤여정 씨가 수어를 준비한 건 아닐까?’ 살짝 의심했었다. 그러나 <뜻밖의 여정> 방송을 보니 아카데미 측은 수상자 발표를 위해 여러 단계의 보안을 거치고 있기에 후보자를 위한 수어의 학습은 순전히 윤여정 씨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윤여정 씨 아니면 어떤 배우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행복한 건 나
아 메마른 내 맘에 단비처럼
잊혀진 새벽의 내음처럼
언제나 내 맘 꿈꾸게 하지
(중략)
그댄 너무 좋아요
그댄 말 없이 내게 모두 말해요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김연우 노래 /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가사 일부)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코다'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코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해서 운 좋게 케이블 TV에서 <코다>라는 작품을 볼수 있었다. '코다'는 Child of deaf adult의 약자로, 부모 중 한명 또는 둘 다 청각장애인이거나 후견인이 청각장애인에게서 자란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아빠, 엄마, 오빠 등 청각장애인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루비의 이야기다. 가족들에게 세상과 소리를 연결하는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 합창단에서 노래하게 되며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명문 대학 오디션의 기회를 얻지만, 자신 없이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을 생각하면 갈등이 깊어진다.

감독은 음악을 들을 수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상황에서 오디오를 없애고 청각장애인의 심경을 경험하게 한다. 입을 벙긋하는 딸만 보일 뿐, 소리는 없다. 음악은 청각장애인에게는 애초 머나먼 미지의 세계인가. 안타까운 순간이다. 아빠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교 오디션 현장에 도착한 딸은 관객석에서 지켜보는 가족을 위해 수어로 노래를 한다. 코다에서 루비가 오디션 곡으로 부른 노래는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다.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from win and lose 
나는 인생을 이기고 지는 것 모두에서 바라보지만
And still somehow
아무튼 여전히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내가 떠올리는 건 삶의 환영
I really don't know life
난 인생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from up and down
나는 인생을 위아래 모두에서 바라보지만
And still somehow
아무튼 여전히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내가 떠올리는 건 삶의 환영
I really don't know life
난 인생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at all.
정말로.

<코다>는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등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코다>의 원작인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감독 에릭 라티고)도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다. 여주인공 ‘폴라’ 역의 ‘루안 에머라’는 프랑스판 더 보이스 2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가수이자 배우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엔딩곡으로 프랑스 샹송의 대가 ‘미셀 사르두’의 ‘Je Vole’(비상)을 새롭게 해석한 리메이크곡으로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마지막 장면 역시 가족을 위한 수어로 노래를 하는데 자신의 현실과 꿈을 호소하고 있어서 여주인공의 심경을 절절히 전달하고 있다. 번안된 가사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저는 두분을 사랑하지만, 저는 떠나요.
이제더 이상 두분의 아이는 없을 거예요.
저는 도망치는게 아니라 날아오르는 거예요.
담배연기도 술도 없이
저는 날아가요. 날아가요.
저는 제 인생만을 믿어요.“
(루안 에머라 노래 / 영화 '미라클 벨리에' Je vole(비상) 가사 일부)

<코다> <미라클 벨리에> 두 영화 모두 훌륭하다. 가족애와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장애와 예술, 장애 예술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농인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은 또 하나의 성과이다. 영화사에 한국인 배우 윤여정 씨가 '냉큼’ 쏘아 올린 감동은 오래오래 아름다운 미담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 그처럼 ‘냉큼’ 판단하고 실천할 만큼 사려있고 통찰력 깊은 사람인지, 윤여정 배우를 보면서, <뜻밖의 여정>을 돌려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윤여정 씨의 ‘냉큼’은 삶의 여유이자 관용이고 배려이자 멋짐 폭발의 진정성 어린 표현이었다. ‘냉큼’ 참 멋진 부사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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