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이 무용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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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하르키우=AP/뉴시스] 지난 5월 1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의 지하철역에 주민들이 대피해 머물고 있는 모습.
[하르키우=AP/뉴시스] 지난 5월 1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의 지하철역에 주민들이 대피해 머물고 있는 모습.

[PD저널=박재철 CBS PD]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서경식 교수는 ‘시의 힘’을 이렇게 정의했다.

승산을 가늠할 때는 이성이 작동한다. 누군가 승산 없는 일을 도모하면 비이성적으로 분류된다.  그때의 승산이란 효용과 성취라는 세상의 셈법이다. 그 셈법에 비춰보면 시는 일견 무용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하지만 진실한 전언은 간혹, 누군가의 바윗덩어리 같은 마음의 틈을 비집고 그곳에다 좌우로 흔들 지렛대를 깊숙이 집어넣기도 한다. 독자를 승산을 따지지 않는 영역으로 어느 순간 데리고 간다. 

시의 자리에 ‘증언’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절박한 상황에서의 절실한 증언만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것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증언은 시에 수렴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 시사주간지 (시사IN 772호 “유모차 밀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도,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에 실린 일기를 보고 나서다. 이 일기를 쓴 이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에 사는 의사 스베틀라나 씨다. 딸을 낳자마자 곧 전쟁이 터졌고 주민의 4분의 3이 떠난 아파트에 잔류한 채 일상으로 틈입해오는 전쟁의 공포를 27일간, 일기 형태로 기록했다.

“오늘도 한숨도 못 잤다. 이제는 밤 10시 이후부터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폭탄이 떨어진다. 전투기 소리가 들리면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안고 복도로 뛰어나간다. 우리 집이 아니야, ‘오늘은’ 우리 집이 아니야…” (3월 2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제 6개월째를 맞고 있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국제뉴스로는 그곳의 참상에 대해 실감하기 어렵다. 내심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읽게 된 이 글은 한 여성의 관점으로 전쟁이 일상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문학이,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대리체험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 일기는, 아니 이 증언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어제 구호품을 타러 갔다. 구호품 줄에는 여전히 70대 이상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몇 시간씩 영하의 추위를 견디며 기다린다. 나는 기저귀와 이유식을 타러 갔다. ‘전쟁은 사람의 가면을 벗겨버린다’라는 생각을 오늘 했다. 배신과 비열함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고결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전쟁이 25일째 지속되고 있다.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통로 끝에 빛을 보고 싶다.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싶다.” (3월 13일/20일)

시사IN 772호 커버스토리.
시사IN 772호 커버스토리.

빚 독촉처럼 매일 매일 닥쳐오는 의식주 문제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고통 그 자체다. 그 고통에 가장 취약한 부류는 노인과 아이, 여성과 장애인이다. 전쟁은 일상의 생존 고리부터 끊는다. 스베틀라나 씨가 그 끊어진 고리를 힘겹게 이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 역시,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소중함이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매일이 선물 같다. 주어진 선물을 잘 쓰는 것 또한 재능이다. 나에게 없는 재능, 나는 짜증내고, 낙심하고, 별 것 아닌 거에 덤벙거린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것들에 정말 감사한다. 오늘 푹 잔 것, 비교적 평온한 것, 화창한 하늘, 그리고 냉장고 안에 치즈가 있다는 것.”(3월 25일)

그의 기록에는 삶의 한 귀퉁이가 하루하루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폭격에 잔해가 된 건물처럼 그의 일상도 천천히 형해화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그러나 전쟁의 거칠고 날선 부분을 극적으로 묘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차분하고 솔직하게 감당해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증언으로서 가진 ‘조용한 힘’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려고. 뭐라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실은 나는 공습이 두려울 뿐이다. 그게 전부다. 대략 20분 후 공습이 다시 시작될 거다. 그럼 또 밤을 새우겠지.”(3월 2일)
  
증언 문학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작품에 <이것이 인간인가>가 있다. 이 책을 쓴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귀환한 사람이다.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그는,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 아무도 믿지 않을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그런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경에는 그의 절박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전쟁 발발이 자리 잡고 있다. 반유대인 학살과 보복 전쟁 그리고 홀로코스트, 겹겹이 쌓여가는 인류 패배의 역사 속에서 증언의 무용함에, 그 쓸모없음에 그는 처절히 절망했으리라.

그렇다면 증언은 멈춰야 하는 것일까?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이 공허한 것이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증언은 계속될 것이다. 그건 증언의 무용함이 유용함으로, 무기력이 활력으로 바뀌어서는 아니다. 루쉰이 말했듯, ‘걸어가면 언젠가 길이 되리’라는 가느다란 믿음 때문이다.이건 희망일까? 아니 희망과는 결이 다르다. 믿음이 없다고 우린 절망하진 않는다.

‘승산의 유무’를 따지는 사람들은 좀처럼 시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 시는 세상의 질서를 대적하기에는 연약하다. 때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고 시는 말하기도 한다. 다만 시는, 더 나간다면 증언은, 희망을 갖기 위해서가 아닌 절망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없다. 그건 걷기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스베틀라나 씨는 지금 걷고 있다. 힘겹게 걷고 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의 일기가, 그의 증언이, 그의 시가 계속되길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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