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프로그램이 진부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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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프로그램이 진부해졌다면
[비필독도서 55] 마이 셰발·페르 발뢰 '로재나'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2.07.19 11: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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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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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범죄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은 흥미와 메시지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줄을 탄다. 좋은 메시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외로운 비명으로 전락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수위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메시지는 장면이 주는 자극에 무너진다. 나는 종종 그 줄 위에서 무너졌는데, 보통은 메시지에 집중하느라 재미있게 만들지 못해서 사달이 나곤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옳은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소리들이 뼈아팠지만, 솔직히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반복되는 곡예를 실패한 사람으로서, 괴로울 때면 범죄 소설에 빠져들었다. 여가인 동시에 공부였는데, 범죄의 흥미로움을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담는 좋은 그릇으로 만드는 성공적인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명석한 두뇌를 가진 탐정이 깔끔한 추리로 범인을 찾아내는 데에서 오는 쾌감과 동시에,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거울로서 범죄를 다루는 추리 소설들에 끌렸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로재나>도 썩 맘에 들었다.

소설은 운하 준설 작업 중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엔 타살의 흔적이 있었다.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 소속 마르틴 베크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건 장소로 향한다. 수사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피해자의 신원을 알아내는 데에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을 의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스웨덴에서 가장 유능한 형사임에도 불면에 시달릴 정도로, 범죄 해결의 실마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이 셰발·페르 발뢰의 소설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의 소설 '로재나'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는 후반부에 가서야, 답보 상태에서 수사가 진전되지 못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미 범죄를 여러 번 저질렀지만 그동안 한 번도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의심하기 어려운 선량한 시민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누구도 그의 죽음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모범적인 복지 선진국 스웨덴의 어두운 그림자와 대면한 마르틴 베크의 마지막 발걸음이 씁쓸한 이유다.

탐정이 아니라 경찰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되면, 범죄는 즐길 거리 이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은 범죄로부터 사회와 시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직업으로서 처리해야 할 과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범죄 역시 점차 그 규모나 수준이 고도화되기에 한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범죄를 뿌리뽑을 수 없다. 탐정의 우월함 대신 수사관의 무력감이 주요한 정서가 된다. 수사과정이 벽에 막히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될 때 무력감은 배가된다.

하지만 이 무력감은 수사가 영웅의 전유물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오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에, 역으로 수사관들이 분투하는 동력으로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미행 과정에서 졸음, 허기,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용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거나, 범행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해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절망적으로 용의자를 뒤쫓는 모습은 독자를 초조하게 만든다. 냉소적으로 사건을 대하지 않고 진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조차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로재나> 이전에도 다수의 경찰 소설이 있었지만, 후대의 작가들이 이 소설을 즐겨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계가 있는 수사관들의 분투가 사실적으로 그려질수록, 그들이 맞서는 범죄도 독자에게 제대로 다가온다. 1960년대의 스웨덴을 2022년의 독자가 무리 없이 산보할 수 있는 것도 기자 출신인 두 작가가 인물과 사건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 놓은 덕택일 것이다. 거기에 박찬욱 감독 식의 코미디 감각에 익숙하다면 배꼽을 잡을 위트를 곁들여서.

10년에 걸쳐 스웨덴 사회가 변해가는 모습을, 좌파의 시각에서 사회가 노동계급을 어떻게 버렸는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두 사람의 기획 의도였다. 고도화되는 범죄에 대한 철학적 함의를 고민하고, 자신들의 진보적 기획에 걸맞은 양식을 찾아냈기에 이 소설은 분명 특별하다.

흔하다 못해 범람하는 범죄 관련 프로그램들 속에서 특별하고 싶다면 비슷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범인이 누구인지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추론하는 과정 자체의 흥미를 잃어버려선 안되겠지만, 대체 이 프로그램이 수많은 주제들 중 굳이 ‘범죄’를 다뤄야 하는지 다시금 진지하게 묻는다면 꽤 특별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건과 따로 노는 진부한 교훈을 마지못해 덧붙이는 것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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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G 2022-07-19 14:38:25
좋은 글이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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