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칸트가 '우영우'를 보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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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칸트가 '우영우'를 보았다면 
[홍경수의 방송 인문학⑧]
  • 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승인 2022.07.2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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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의 성공으로 한국 영상시장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콘텐츠 시장은 누가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킬러콘텐츠를 만드느냐에 따라 '빅 머니'가 결정되는 게임장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를 분석하는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방송 콘텐츠 전문가인 홍경수 아주대 교수가 2~3주에 한 번 꼴로 인문학적 관점으로 콘텐츠를 분석·비평한다. -편집자 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스틸 이미지. ©더시그니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스틸 이미지. 

[PD저널=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우영우 현상이라 부를 만하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창대한 킬러콘텐츠가 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둘러싸고 다양한 진단과 비평도 쏟아지고 있다. 또 하나의 비평을 보태지 않기 위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칸트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비판으로 인간의 인식 및 사유, 도덕과 취향의 핵심 원리를 짚어냈다. 그중 판단력 비판이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원리’에 대한 설명이므로 드라마에 환호하는 대중의 열광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반영보다 바뀔 미래의 꿈

드라마를 둘러싼 논점 중 하나는 드라마의 판타지성이다. 다른 영웅주의 드라마와 비교할 때 <우영우>가 갖고 있는 판타지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드라마 제작자는 변호사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지나치게 허황되어 보이는 설정을 억누르고 있으며, 진부한 연출도 피하고 있다. 문지원 작가는 전작 영화 <증인>에서 변호사가 꿈인 자폐를 겪고 있는 어린 증인을 주인공으로 대본을 쓴 경험도 있다. 자폐가 장애가 아니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에 어쩌면 누구에게나 일정 정도의 자폐적 특성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소수화의 위험성도 피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타지 논란은 계속된다.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우영우(박은빈)가 서울대 법대를 수석졸업한 뒤 변호사시험에서 최고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으나, 자폐 때문에 취업을 못하고 있다가 6개월 뒤에 아버지의 후배가 운영하는 로펌에 취업하게 되는 설정부터 그러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관점을 꿰뚫어보고 그로부터 법리를 발전시켜 나가는 우영우의 활약 역시 과장된 판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자폐 스펙트럼을 겪고 있는 자녀를 둔 사람들의 의견이다. 드라마를 통해 자폐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넓어져서 반갑지만, 최상위 ‘고기능성’ 자폐의 성취가 오히려 좌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영우와 같은 자폐는 없다!”

한 매체는 ‘우영우는 열광, 전장연은 외면, 우리는 달라졌을까?’라는 제목으로 드라마에 대한 열광과 장애인의 현실적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는 논지를 펼쳤다(노컷뉴스, 2022.7.21.). 이러한 주장은 대중의 인식을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지만, 의식의 밑바닥에는 한 편의 드라마로 세상이 확 바뀔 것이라는 과도한 욕망이 담겨있다.    

철학자 한자경은 칸트를 인용하며 인간의 심성 능력 또는 마음의 작용은 크게 인식능력으로서의 지각과 실천 능력으로서의 욕구로 분류된다고 설명한다. 전자가 세상 존재가 어떠하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아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들의 존재 양상을 내 의지대로 능동적으로 바꾸어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심성활동은 우리 몸에 구비된 두 종류의 신경체계, 즉 감각신경계와 운동신경계의 구분과도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능력으로서의 지각이 이미 존재하는 과거에 의해 의식이 규정되는 것이라면, 욕구나 실천은 앞으로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미래 상태에 따라 행위하게 된다는 점에서 미래에 의해 규정된다.

대중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것은 드라마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드라마를 통해서 현실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실천성의 동력에 주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청자들이 자폐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와 행복할 권리가 보장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응원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드라마의 판타지가 지나치게 엉뚱하지 않다는데 동의한다면, 드라마는 시청자가 기대하는 미래 상태로 이끌어준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8화 방송 화면 갈무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8화 방송 화면 갈무리.

캐릭터와 연기자 팬덤

우영우 현상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캐릭터와 연기자의 매력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캐릭터의 특성도 뛰어나지만, 박은빈이라는 연기자에 대한 팬덤이 큰일 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영리한 미디어들은 박은빈의 필모그래피를 총정리하거나 연기의 특성을 분석하며 시청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유인식 PD 역시 기자회견에서 “우영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많지 않고, 처음에 박은빈이 1차적으로 거절했을 때 프로젝트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며 박은빈의 연기력에 신뢰를 보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렇다. 대중은 우영우 현상의 상당부분이 박은빈의 몫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

실제로 우영우 배역에 다른 연기자가 연기했더라도 지금과 같은 열광이 일어났을지는 회의적이며, 장애인 연기자가 직접 연기하지 못해 아쉽다는 의견은 일견 동의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드라마는 대중성의 싸움이며, 그 연기자가 박은빈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박은빈의 연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보편적 평가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칸트미학의 가장 큰 특성은 취미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이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다는 것이다(무관심성). 미에 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섞여 있으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며 순수한 취미판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일체의 관심이란, 신체적 욕구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관심과 선한 의지에서 발생하는 지적 관심을 지칭한다. 욕구에 기반한 관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쾌적한(angenehm)것’이며, 도덕적 선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선한(gut) 것’이다. 순수한 미적 판단에서의 만족은 감각이나 도덕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무관심의 만족으로 ‘끌리게’(gefallen)되는 것이다. 

박은빈의 연기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대입해보자. 만약 필자가 박은빈의 외모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좋은 쾌적한’ 감정이 든다면, 이것은 감각적 관심으로 향락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박은빈의 이력이나 평소 행실에 따라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면, 이것은 도덕적 관심이라 하겠다. 칸트가 말하는 미적 판단은 이 둘에 속하지 않고, 맡은 바 배역에서 최고의 연기를 해내는 박은빈을 지칭하는 것일 터다. 물론 전작 <스토브리그>나 <연모> 등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같은 열광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배역 우영우와 연기자 박은빈의 분리불가능한 접합의 경지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인데, 어떻게 보편성을 띠게 되었는가? 그것은 미적 만족의 쾌감이 무관심적이고 비의도적이기 때문이다. 미적 판단은 향락이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단지 마음에 든다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보편성을 띠게 되고, 보편성을 띤 미적 만족의 쾌감이 모여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는 것이다.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방송영상 갈무리.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방송영상 갈무리.

상상력은 노둣길이다

칸트는 우리가 갖게 되는 관심을 경험적 관심으로도 설명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지식과 느낌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며 따라서 미에 대한 쾌감과 취미도 공유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미는 오직 사회 안에서만 관심을 일으키며, 우리는 사회 안에서만 미를 지니고자 하는 관심을 갖게 된다”(칸트). 수많은 미디어들의 우영우 관련 보도나, SNS를 가득 채운 드라마 포스팅은 칸트가 말한 ‘경험적 관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매주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함께 시청하고 소감을 공유하는 과정은 흡사 야외에서 축구를 함께 보는 퍼블릭 뷰잉을 연상케 한다. 

함께 시청하는 경험의 과정에서 극단적인 원칙론이나 과도한 욕망은 도리어 사회적 진보의 발걸음을 좌절시킨다. 드라마가 현실과 CG를 섞어서 답답한 현실과 고래의 쾌적함을 재현하듯,  드라마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댓돌을 던져서 섬과 섬을 잇는 노둣길을 만든다.  바다에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깟 돌 던져봐야 고속도로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맥 빠지게 한다.

드라마는 사회적 제도가 아니며(웬지 점점 사회적 제도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회정책은 더더구나 아니다(정책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는 있겠다). 한 편의 드라마가 화제가 되었다고 해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듯 한계를 지적하기보다는 진보의 측면에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그래야 한계 없는 상상력이 앞으로 더 활발하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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