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리’, 답답한 전개 속에 숨겨진 정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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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답답한 전개 속에 숨겨진 정의의 의미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사회의 모순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3.01.1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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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트롤리'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

[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약자를 위해 강자들과 싸우는 국회의원 남중도(박희순)와 남몰래 선행을 하면서 조용한 삶을 살려는 그의 아내 김혜주(김현주).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가 처음 보여주는 이 부부의 모습은 이상적이다.

사회 정의의 차원에서 보면 사심이 없고, 오로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중도는 대중적 지지도 높은 정치인이지만, 그런 그의 앞에 갑자기 많은 비극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첫 번째는 아들의 죽음이다. 갑자기 사체로 발견된 아들에게서는 마약까지 소지품으로 나왔다. 자식의 이런 문제는 정치인으로서 치명적인 오점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아들이 사체로 발견되던 날 가출한 딸을 찾기 위해 국회의원이 공권력을 유용한 듯한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김혜주가 남편이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알려 경찰의 도움을 요청한 일이 사단이 됐다. 세 번째는 죽은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며 김수빈(정수빈)이 이들 부부 앞에 나타난 일이다. 

이렇게 여러 사건들이 동시에 터지자, 남중도는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여론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방송에 나와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그는 사적인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과 스토킹 피해를 당하던 한 여성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을 꺼내놓는다.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가해자는 장래가 촉망받는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사건이다. 

남중도의 이 공개저격은 자신의 위기상황을 모면하게 해주고 나아가 ‘사회정의’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인터넷으로 쏟아진 악플 세례 속에서 궁지에 몰린 의대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결국 이 사건은 남중도와 그의 아내 김혜주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는다. 

그런데 특히 김혜주가 충격을 받은 건, 자신 또한 비슷한 일을 학창시절 겪어서다. 고교 시절 영산에서 절친이었던 진승희(류현경)의 쌍둥이 남매 진승호가 그를 성추행하려 했고 이를 김혜주가 경찰에 신고하자 진승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이 있었다. 피해자는 김혜주였지만 가해자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사건의 진상은 묻혔고, 김혜주는 마치 장래가 촉망되는 한 사람을 죽인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김혜주는 이 트라우마 때문에 영산을 떠나 이름까지 바꾸고 조용히 살아간다.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

<트롤리>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과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고안한 이른바 ‘트롤리 딜레마’를 상황으로 가져왔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거론한 바 있는 딜레마. 즉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동차가 철로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한쪽 철로에는 5명의 인부가 다른 쪽에는 1명의 인부가 있다면 레버를 당겨 선로를 변경할 것인가?’ 같은 선택의 딜레마가 그 상황이다.

언뜻 보면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게 옳다는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관점인 벤담의 공리주의가 맞다고 생각되지만, 제 아무리 다섯 명을 구한다 해도 존엄한 인격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을 희생시키는 건 살인행위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의무론 앞에 딜레마가 생긴다.

<트롤리>는 이 정의에 대한 질문을 드라마틱한 극적 스토리 속으로 가져왔다. 남중도와 김혜주 부부가 정의롭다는 판단 하에 했던 어떤 선택들이 의외의 결과로 이어지면서 생기는 갈등을 다뤘다. 결국 <트롤리>가 말하는 건 정의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정의는 어느새 시대의 코드가 되어 버렸다. 많은 드라마들이 정의를 호명하고 손쉽게 사적 복수까지 동원해 부정한 이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를 이른바 ‘사이다 전개’로 그려내곤 한다. 현실이 해주지 못하는 정의 구현의 문제를 허구의 판타지를 통해서나마 보고픈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지만, <트롤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정의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드라마는 결코 시원한 사이다가 등장하지 않는다. 시청자들로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트롤리>라는 드라마가 가진 가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단순화된 정의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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