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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신화’ 뒤집기

|contsmark0|#1이승복은 콩사탕보다 별사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비들이 선무활동을 한답시고 아이들을 모아놓고 사탕을 나누어 주었는데 별사탕을 먼저 콩사탕을 나중에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별사탕은 이승복이 선 앞줄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의로운 소년 이승복이 이를 용납할 리 없다. 그는 소리쳤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2 이승복은 학과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운동보다 공부를 더 좋아했다. 공비들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학용품을 먼저 축구공을 나중에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이승복의 앞줄에서 학용품이 다 떨어졌다. 그의 차례부터 축구공을 나누어 줄 판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소리쳤다. “나는 공 상당히 싫어요!” #3 이승복은 공비들이 물건을 다 나누어준 뒤에도 근처에서 계속 얼쩡거렸다고 한다. 남은 물건을 차에 싣고 있던 공비중의 한 사람이 이승복을 보았다. 공비는 이승복에게 보고 있지만 말고 와서 거들라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가만있을 이승복이 아니다. 그는 소리쳤다. “(그 물건들은) 공산당이 실어요(載)!”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한 조금은 썰렁한 얘기다. 수년전 사람들에게 구전되며 pc통신을 장식했던 이른바 이승복 시리즈다. 감히 반공의 영웅 이승복 소년을 가지고 이런 유머를 만들다니. 천인공노할 공비의 만행으로 죽어간 이승복 소년의 희생을 소재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조크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면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무리가 아니다. 필자 또한 그랬으니까. 1960년대말에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에게 이승복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였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이승복은 반공교육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 무수한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그는 빛나는 화두 그 자체였다. 수업시간에 그의 ‘장렬한 최후’를 듣고 또래의 어린이들은 숙연한 자세로 묵념을 올리며 만약 그같은 일이 자기 앞에 벌어진다면 자신은 결코 이승복처럼 하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오열했었다. 그랬는데… 왠 콩사탕에, 축구공이람. 필자는 이승복 시리즈를 처음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잊지 못한다. 이것은 필경 어떤 불온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만들어낸 얘기임에 틀림없어. 마땅히 출처를 끝까지 추적해 발본색원해야 한다. 어쩌면 거대한 5열의 뿌리가 드러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분기탱천하다가 문득 이승복 시리즈를 가만히 음미해 본다. 가만 있자, 콩사탕...? 공 상당히…? 공산당이 실어요…? 하하 그것참 말되네. 그럴 수도 있겠어. 그때 정말 그런 것 아냐…? 그렇다면 혹시…? 돌연 엄청난 해머 같은 것이 뒤통수를 강타한다. 이때의 충격은 말하자면 천동설에 주박(呪縛)당했던 중세인이 지동설의 진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흔히 뒤집기나 비틀기를 코미디의 주요 요소로 들곤 한다. 구시대의 낡은 권위가 뒤집히거나 비틀리다 통렬한 풍자 속에서 해체당할 때 우리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패러디는 이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기법이기도 하다. 예의 이승복 시리즈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일세를 풍미하며 분단시대의 한국인을 압도했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신화가 알고 보면 한낱 커뮤니게이션의 ‘오류’나 텍스트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보여준다. 바로 여기에 이 시리즈의 절묘한 문학적 성취가 있다. 사족이지만 세 가지 경우 모두 공비가 이승복의 말을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로 듣고 만행을 저질렀을 것임을 적어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표현의 합법적 공간을 확보하려 하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이승복 시리즈가 정확히 언제 나타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차피 얼굴없는 네티즌들의 자생적 자발적 소산이다. 그런 만큼 당대의 정서를 적확히 반영하고 있다. 이승복 시리즈는 냉전의식을 증폭시키는 억압적 기제에 대한 누적된 반감이 그와 같은 패러디로 나타난 것임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리즈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작문이냐 아니냐에 대한 시비 를 초월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금 ‘이승복 신화’의 작문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사실 규명이 우선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팩트를 둘러싼 기계적이고 미시적인 공방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30년이 넘은 지금 ‘이승복 신화’가 작문이냐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양 진영의 입장을 고려할 때 어차피 평행선일 뿐 결말이 나지 않는 소모전이 될 것이다. 물론 진실은 하나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말할 것인가. 살아남은 이학관 씨가 할 것인가. 문제의 보도를 한 기자가 그럴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승복 신화’를 그 이후 남북의 냉전적 대립 구조 속에서 누가 어떻게 절대적인 상징체계로 만들어갔는지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른바 안보 상업주의가 어떻게 분단을 고착화하고 민족의 미래를 유예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지난 날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북측의 무력 도발이 있고 난 후면 거의 어김없이 남쪽에서는 이를 빌미로 체제를 강화하거나 선거국면에서 여당에게 유리한 국면조성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럴 경우 또 북에서는 그에 상당하는 권력 기반의 강화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를 두고 남과 북의 권부(權府)가 서로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고 했던가.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길게 보아 ’68년의 이 사건 이후 수면하에 있던 ‘중단없는 전진’ 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69년 삼선개헌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종당에는 유신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이 와중에 ‘이승복 신화’가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그 효용을 극대화했겠는가. 바로 이것이 ‘이승복 신화’의 논란에서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될 대목이다. 그럼에도 허망한 도그마로 끝난 이 신화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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