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일본 대중 문화 개방에 대한 단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란 시인·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

|contsmark0|2002년에는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이 열린다. 세계적인 대축제가 역사적인 두 적대국에 의해 나란히 개최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암시처럼 보인다. 우선 2002라는 숫자가 암시적이다. 나는 무슨 괴상한 숫자 신비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된 대축제의 의미를 가능한 한 다양하게 짚어보려는 것뿐이다. 앞과 뒤에 2가, 그리고 세계를 상징하는 두 개의 축구공이 가운데 나란히 놓여 있다. 철학적인 배치이다! 1000년대에, 인간은 제1존재로 생각되는 인간 본위의 세계관을 발달시켜 왔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개별자인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한 우위를 점해 왔다. 자연은 인간의 영광을 위하여 개발되고 착취당했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간에도 적용되었다. 서구는 서구라는 1을 위하여 2와 3을 착취해서 부를 쌓아올렸다. 그러나, 이미 조금씩 드러나고 있거니와, 이대로 가면, 2와 3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1도 망한다. 같이 살아갈 궁리를 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그것이 2로 시작되는 2000년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2라는 숫자는 상생(相生)의 지혜를 위하여 머리를 맞댈 것을 인류에게 명령하고 있다.그렇다면, 1000년대의 두 적대국에 의해 나란히 개최되게 된 2002년 월드컵은 두번째 밀레니엄의 빛나는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이 스스로 신비한 부적이 되어줄 리 없다. 가만히 있는데 2002라는 숫자가 저절로 상생의 터전을 마련해 줄 리 없다는 말이다. 이 숫자를 의미있는 상징으로 만드는 것은, 두 나라 사람들의 실제적 노력이다. 신도 인간이 못나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냉전과 개발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땅을 밟았다. 태평양 물에 빠져죽을 뻔했던 사람이 새로운 시대의 테이프를 끊게 된 것이다. 개인사적인 의미만으로도 감동적인 일이다. 한일 양국이 그 동안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차제에 불거져 나온 ‘일본대중문화 개방’ 문제는 명쾌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경제협력을 빌미로 이루어지는 일이어서 모양이 썩 좋지를 않다.앞서서, 2002년의 상징적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두 나라가 대등한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드러난다. 상생은 상생의 두 주체가 대등한 자리에 서지 않는 한 더부살이나 곁방살이로 전락한다. 자칫하면, 다시 1000년대의 식민주의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이번에는 정치적 식민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식민주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북이나 쳐주고 말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은 없다’고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두 나라 사이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그동안 일본 대중 문화는 공식적으로는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대중 문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자유롭게 소통되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통제된다는 사실 때문에 신비화되었던 측면도 없지 않다. 문화를 정치·경제 논리에 종속시키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원칙적으로는 개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막아놓아도 어쩔 수 없이 들어올 것은 들어온다. 그렇다면, 열어놓는 것이 낫다. 차라리, 우리 문화와 부딪치게 하면서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사실 그 동안에는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얌체같은 문화 종사자들이 일본 것을 슬쩍슬쩍 베끼면서도 아무런 자괴감도 느끼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tv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패션·대중음악, 심지어는 본격 문학 종사자들까지 아무 생각 없이 일본 문화를 베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형편에 터놓았다가 다 먹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막아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을 믿고 터놓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5000년 동안 중국 옆에서 동화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민족이 아닌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은 만만치 않다.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치면 그 역량이 더욱 배가될 수도 있다. 그 동안 미지의 베일에 가려 알게 모르게 우리 문화 안에 스며들어 있는 일제의 잔재를 이참에 제대로 청산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일본문화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직접적이고 빠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제일 먼저 각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 쉽게 곶감 빼먹듯이 일본 흉내나 내지 말고, 우리 문화의 얼을 살려내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일본문화에 먹히지 않을 경쟁력있는 문화를 매개해야 한다. 현재의 추세로 보아서, 당분간은 문화역조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다. 특히 10대들 사이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10대의 감수성에 맞는 전통의 재해석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나간다면, 승산은 얼마든지 있다. 내용은 계몽적이지 않되, 방식은 계몽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체계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오히려 우리가 문화적 흐름을 선도해 나갈 수도 있다.그렇게 해 나가면서, 꾸준히 일본의 태도를 감시해야 한다. 지금 일본이 과거에 해왔던 방식으로 현장만 모면하려는 얕은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21세기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반자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 지금까지의 공식적 언명으로는 분명하게 판단되지 않는다. 일본이 구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촉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역량에 달린 문제다.
|contsmark1||contsmark2|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