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단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ntsmark0|전우성 kbs스페셜팀
|contsmark1|
|contsmark2|
pd는 보여주는 존재다. 뭔가를 보여줘야 프로그램이다. 보여줘도 ‘잘’ 보여야 사람들은 봤다고 한다. 은유나 역설과 같은 ‘꼼’은 아주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pd의 욕망은 가볍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흔들림을 지워줄 수 있는 무거운 ‘나’가 코아에 자리 잡지 않는다면 가벼움 위에 올라탄 pd의 욕망은 잔혹한 칼춤을 탈 수 있다.
|contsmark3|
그래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pd라면 누구나 가슴에 선명한 칼날자국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직업의 숙명이다. 그 피흘림은 너무나 아프다. 그래서 다시금 무거운 ‘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위험하며 고통스런 작업을 매번 반복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놓지 않아야만, 이 가벼움의 흔들림이 칼바람이 되기 전에 멈출 수 있다고 믿는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항상 어떤 순간에도 ‘나’를 놓지 말아야 한다.
|contsmark4|
|contsmark5|
이 글을 쓰기 약 2주전, 나는 이종 격투기 대회장에 있었다. 재일교포 이종격투기 선수인 추성훈의 대회당일 촬영을 위해서였다.
|contsmark6|
그 날 촬영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일본에서 아들의 경기 응원을 위해 꺼이꺼이 찾아온 어머니. 오사카 본가에서 취재할 당시, 어머니는 나에게 붉은 색 끈을 보여줬다.
|contsmark7|
작년 아들이 k-1 데뷔전을 승리로 이끌 던 그 날, 글러브를 감았던 끈이라 했다. 어머니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끈을 소중히 가슴에 보듬고 매 경기마다 그 끈을 놓지 않는다 했다. 자신만의 행운의 상징이 되어, 당신 손에 이 끈이 있는 한, 당신의 아들은 아프지 않고, 상처입지 않고, 무사히 승리할 것이라 믿고 또 믿는 것이다. 행여나 잊을까, 어머니는 이번 한국 방문 2주전부터 벌써 여행 가방 깊숙이 그 끈을 챙겨두시고 계셨다. 가방 속 끈과 어머님 말씀은 카메라에 잘 담아 두었다. 이제 대회 당일 어머니 손에 단단히 묶여 있는 붉은색 끈 타이트 샷, 그 타이트한 끈에서 가만히 틸 업하면 애타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무빙샷, 이 이상 어머니의 마음을 시청자들에게 잘 “보여줄 수”있는 컷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contsmark8|
대회가 시작되고 어머니 손에는 아직 붉은 끈이 보이지 않았다. 상관없다, 어차피 마지막 순서인 추성훈이 등장하면 어머니는 당신의 지갑에서 살며시 행운의 상징인 붉은 끈을 꺼낼 것이다, 그 타이트 샷부터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링 위에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터진 볼과 입술에서 흐르는 붉은 핏자국이 비장감을 더하고 있었다.
|contsmark9|
|contsmark10|
어머니는 거의 경기를 보지 못하고 계셨다. ‘아, 이것도 담아야 하는데….’ 6mm 카메라맨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갔담! 그래, 담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꼭 담아야 하는 것은 아냐.’ 시간이 흘러 추성훈 바로 전 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점점 울 것 같은 표정이다.
|contsmark11|
이제 추성훈 시간이 되었다. 대회장에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의 ‘time to say goodbye’, 그의 이미지 송이 울려 퍼진다. 어머니 눈엔 이미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붉은 끈은 왜 안 꺼내실까?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6mm 카메라맨도 카메라를 돌리면서 계속 나를 쳐다본다. 참고 참다 어머니 옆에 슬쩍 다가섰다. “어머니, 이제 붉은 끈 꺼내실 거죠?” 아, 얼마나 무례한가! 그래도 어머니는 아무런 답이 없다. 그 순간부터 대략 1분간, 내가 그 날 촬영의 핵심, 붉은 끈을 포기할 때까지, 정말 내 머릿속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념이 맴돌았다.
|contsmark12|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온 것은 역시 무거운 ‘나’였다. “왜 프로그램을 하는가? 이 고통을 계속 되풀이해 자초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붉은 끈은 깨끗이 프로그램에서 사라졌다.
|contsmark13|
붉은 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며칠전 어머니를 만나 식사를 했지만 감히 여쭤볼 수 없었다. 이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애타는 어머니를 놓고 어떡하든 그림을 만들고자 했던 나의 가벼움과 위험한 욕망은 그렇게 잠잠해졌나보다. 그렇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인생 어디엔가 녀석은 늘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언제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
|contsmark14|
|contsmark15|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