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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생각한다

|contsmark0|올 한해 전국 초중고교에서 ‘왕따’가 5천4백명이나 나왔다는 교육부 조사는 충격적이다. 무기명 설문조사의 결과가 이 지경이니 그 실상이 어떨지는 상상하기가 두렵다. ‘콤파스나 압정으로 손찌르기’, ‘우유에 설사약 넣기’ 등 ‘왕따’ 행태는 가히 가학적으로 치닫는다. ‘왕따’를 견디다 못해 이민을 가고 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이미 낯설지 않다. 우리의 ‘왕따’는 주로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야비하다.
|contsmark1|참으로 개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왕따’의 원인을 더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먼저 누가 누가 잘하나식의 등수 가리기부터 시작하는 우리 교육이 그 첫째다. 어린이의 필독서인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우화부터 전혀 다른 조건을 서식 환경으로 삼고 있는 두 동물이 불평등한 상태에서 경쟁을 위한 경쟁을 하는 얘기이다. 자신이 지닌 우월적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거북이를 ‘따돌리기’ 위해 뭍에서의 경주를 제의하는 토끼. 상대가 자고 있는 틈을 타 집요한 노력으로 경주에서 토끼를 ‘따돌려’ 역전을 시키는 거북이. 애초에 이야기를 만들었을 사람의 선의를 모르지 않으나 이 우화는 승리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우리네 풍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contsmark2|우리 어린이들은 글을 배우면서부터 상대방을 어떻게든 따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비인간적 경쟁 풍토에서의 처세술을 습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부적응자 또는 낙오자로 규정하여 ‘왕따’로 따돌리면 한 사람의 경쟁자를 도태시키는 일이다. 그러니 이심전심으로 이 음모에 동참할 만하다. ‘왕따’의 확산에는 이러한 범죄공모적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ontsmark3|다음으로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홀아비’ 놀이다. 수명의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가 그중 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구별되는 무엇이 있는지를 한 가지씩 찾아내어 “홀아비!”라고 놀린다는 것이다(가령 한 어린이만이 안경을 쓰고 있으면 그 어린이는 ‘홀아비’가 된다).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왜곡된 집단주의는 ‘똘레랑스의 부재’ 속에서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조직의 이름으로 그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마침내 그를 ‘왕따’시킨다. 신체적 약점이 있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집단의 평균과 대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죽음보다 공포스런 ‘왕따’가 기다리고 있다. 작금의 ‘왕따’는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파행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병리적 증후군이다. 기성세대의 도덕적 파탄이 그대로 청소년들에게 투영된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의 발현이 중요하다는 얘기 따위는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오늘의 대한민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나라한 투쟁’ 상황이요, ‘부도덕한 인간과 보다 부도덕한 사회’라는 복합 중첩의 모순이 있을 뿐이다.
|contsmark4|현실의 반영체계라는 방송은 어떤가. 저소득층, 노인과 장애자 등 소외계층을 배려하고 감싸안으며 나아가 ‘왕따’와 같은 타락한 현상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프로그램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처에 잘 나고 이쁘고 똑똑한 사람이 출몰해 못나고 멍청한 사람들을 기죽이는 프로그램 일색이다. tv는 그들의 우월적 지위를 극대화시켜 주고 강화해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미모에 관한 신드롬의 조장, ‘다이어트교’의 전도사 노릇, 승자 우위를 정당화하는 ‘성공신화’의 유포, 현안에 관한 진지한 응시를 방해하는 현실도피 등은 방송이 ‘왕따’의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왕따’의 실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있다가 뒤늦게 호들갑을 떠는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방송이 힘없고 소외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왕따’시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글을 쓰고 tv를 켠다. 오랜만에 tv에 출연한 이영자가 모 토크쇼에 나와 있다. 그녀가 말한다. “지난 몇 개월의 공백기간 동안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성과가 좋은 편인데 좀 있으면 여기 mc의 자리가 위험할 것”이라는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여자 mc가 냉큼 말을 받는다. “몸매는 그렇게 한다 치고 얼굴은 어떻게 할 거죠?” 이에 대한 이영자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생략하겠다. 상대방의 약점을 비집고 말꼬리를 비트는 공격적인 조크가 토크쇼의 묘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씁쓸해지는 것을 지울 수 없다. ‘왕따’의 그늘은 이렇게 우리 근처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contsmark5|<본보 발행인> |contsmark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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