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비평] PD가 천직인 방송인 김현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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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갈 새도 없이 보낸 방송생활

|contsmark0|흔히 월급 많은 걸로 소문난 방송국 사람답지 않게 김현숙씨는 차가 없다. 얼마전 차를 한 대 사볼까 하고 궁리를 프라이드로 시작해 소나타까지 발전시켜 보기도 했으나 월부금이 겁이 나서 그만뒀다. 출퇴근 길에는 부서 직원이 기사 노릇을 해주고, 택시도 자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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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칠십 년대 초반 2년 남짓 tv에서 진행을 본 적이 있고, 지난 84년 <연예가 중계>를 연출하면서 다시 13년만에 사회자로 잠시 복귀했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섬세하던 입술선이 조금 흐려졌을 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수해온 커트 머리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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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금(1988년) 직함은 kbs 예능국 부주간이다. <쇼 비디오 자키> <유모어 1번지> <코메디 하이웨이> <쇼 특급>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같은 것들이 그가 기획이라는 이름 아래 이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개별 프로듀서들의 프로그램 몇 개를 통괄하며 예산을 확보하고 기본 틀을 잡고 그 밖에 행정적인 뒷바라지를 하는 게 요새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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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연출을 할때와는 또다른 어떤 맛을 느낀다고 한다. “딱 차고 앉아서, 전체를 놓고 보면서 이건 이렇게 틀어막고, 저건 저렇게 해서 틀어막고” 하는 일이 체질에 잘 맞는다는 것이다. 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와 그룹 코리아나의 공연 같은 대형쇼도 그의 기획력이 빚어낸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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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부터 그는 명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수학여행가서 처음 해 본 오락회 사회 솜씨가 호평을 받더니, 이화여대 4년 동안 갖가지 학교 행사의 사회를 도맡아 했고, 졸업반때는 이대 단독 위문단을 꾸려 월남 공연까지 다녀왔다. 졸업땐 대학에서 ‘1년만 더 다닐 수 없겠냐’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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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은 제과 회사였는데 ‘아니다 싶어’ 한달반 만에 그만두고 조흥은행 당좌계에 취직했다. 은행 다니는 짬짬이 ywca 청개구리 모임에서 사회를 보곤 했는데 어느 날 kbs 간부의 눈에 띄었다. 주저없이 바로 은행에 사표를 냈다. 은행에선 말리면서 어디로 가냐고 했다. “방송국 가게 됐다”는 말에 은행 간부는 “정말 제 길을 찾아가는 구나”며 순순히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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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71년 1월부터 방영한 <젊은 세대>라는 좌담 프로그램의 진행이었다. 요새처럼 스크립터니 뭐니 하는 것도 따로 없던 시절에 구성도 하고, 사회도 보고, 노래도 불러 가면서 발군의 솜씨를 보이는 그 신인 진행자는 곧 화제의 인물이 됐고, <젊은 세대>는 단연 인기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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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막노동판과 견주어지는 거친 조연출 일을 하면서도 말로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타고난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조연출 할때 한번은 평택에서 공개 방송을 하는데, 5만 명이 한데 모여 밀치고 땡기고 아우성치는 걸 내가 마이크 잡고 단 5분 만에 정리했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면 한눈에 사람들 분위기를 딱 봐요. 그리고 눈을 일일이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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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효과 있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 tv라는 매체의 속성이라 한다면, 그런 재주를 가진 그가 tv라는 물에서 노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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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몸담고 있는 부서는 예능국이지만 그가 방송국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간을 보낸 곳은 교양국이다. kbs 교양국의 대표작 <여덟시에 만납시다>는 81년에 시작돼 <아홉시에 만납시다>로 바꿨다가 뉴스 시청률에 지장을 준다고 해서 다시 <열한시에 만납시다>가 됐다. 국내 최초의 생방송 토크 쇼로 기획의 참신함, 소재의 기발함, 기동력있는 현장 르포 형식들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 프로그램에 매달려 “물 버리러 갈 틈도 없이” 바쁘게 3년 남짓 보낸 뒤 우리나라에서 토크 쇼는 안 된다는 정설을 뒤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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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팀이 방을 따로 쓴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사랑방 중계> <추적 60분> 같은 것들이 바로 그 프로그램의 한 대목을 키워 새로 탄생시킨 프로그램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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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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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샘이깊은물’ 1988년 12월호 <이 사람이 사는 방법 - 방송인 김현숙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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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씨는 현재 프로덕션 ‘인터드림’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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