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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상실’로 표류했던 한 해, 의무가 너무 막중하다

올 한해 방송계는 불황의 터널을 지났다. 광고 완판은 옛말, 50%를 밑도는 광고판매율로 방송사는 인원감축·조직축소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며, 초긴축재정으로 제작비부터 삭감해 현업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또 새정부 출범으로 인한 ‘방송개혁’에 대한 기대도 통합방송법안 처리가 내년 2월로 미뤄짐에 따라 사그라들었고, 방송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IMF 한파에 떠밀려 명확한 목표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했다고 평가되는 1998년. 연합회보는 방송계 1년을 평가하고, 내년 전망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사 회 : 권문혁 본보 주필(MBC)참석자 : 정길화 PD연합회장 장해랑 PD연합회 남북교류위원장 (KBS) 엄민형 PD연합회 방송법특별위원장 (KBS) 이채훈 PD연합회 방송비평위원장 (MBC) 황인수 PD연합회 윤리위원장 (EBS) 정남진 CBS 전 노조위원장 (CBS)장 소 : PD연합회 회의실일 시 : 1998. 12. 19.(토) 오후 3시권문혁(사회) :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정리하는 이 모임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먼저 정길화 연합회장부터 올 한 해를 짚어 달라.정길화 : IMF 파고가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한 해였다. 구조조정, 퇴출의 와중에 방송은 안팎으로 힘들었다. 방송법의 교착, 외주비율 논란이 있었고,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과 수달 파문이 있었다. 시청자들에게 위안과 희망, 그리고 비전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몸을 추스리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한다.정남진 : 올 한 해는 상당히 암흑과 같은 터널을 지난 듯하다. 방송계 전체로 보면 중요한 아젠다를 상실한 기간이 아니었나 한다. 작년까지는 방송 독립 등의 주된 이슈나 아젠다가 분명하고 명확했으나, IMF 이후 그런 논의가 유보되어 각 방송사나 개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생존논리에 매몰되었다고 본다.엄민형 : 아젠다 상실의 시기였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지난 1997년 연말은 정권교체와 경제위기라는 많은 변화들이 일시에 폭발한 한 해였고, 우리는 그 변화에 아무런 대책 없이 1998년 한 해를 보냈다. 지난 1년은 구조조정을 강요받았던 시기인데, 유일하게 언론만큼은 구조조정이나 개혁에 있어서 일정 부분 유예기간을 제공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별 성과 없이 보낸 1년이 이제 우리에게 타율적 구조조정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내부적인 자성으로 내년 초에 닥칠 바람을 대비하여야 한다.권문혁(사회) : 각 분과별로 지난 한 해를 평가해 주기 바란다.장해랑 : 올 한해의 남북방송교류에 대해 논하자면 올해는 방송에 있어서의 남북교류, 북한방송 개방문제에 대해서는 첫 출발의 해이고, 물꼬를 튼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송교류의 큰 방향은 잡혀있지만, 그것이 구체화되기에는 아직은 극복해야 할 것이 많다. 우선 남북방송인이 만나야 할 것이다. 문화적인 교류부터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연합회도 여러 통로로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현재 언론의 방북취재가 한건주의, 선정주의에 빠져 통일에 기여하기보다는 엄청난 자본을 들여가면서 그 결과로 ‘폼’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정남진 : SBS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나 KBS의 <림꺽정> 등 북한의 극영화, 문예영상물이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이와 같은 북한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북한사람들도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우리의 인식이나 편견을 고치기 위해서는 북한방송의 개방과 직접 교류가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게라도 먼저 공개한다든지, 북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권문혁(사회) :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고 한다. 올 한해 우리 방송 프로그램들이 어떠했는지 말해달라.이채훈 : 정권교체 이후에 개혁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했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를 얼마나 정확히 진단하고 대안을 보였는가 하는 점에서 평가하면, 몇몇 돋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최근 <추적 60분>의 현장취재나 언론 성역을 다룬 등이 있었고, 소재금기영역을 과감히 깬 점에서 몇몇 오락프로그램도 돋보였다. 또, <여성시대>는 ‘우리가 이 시대에 시·청취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위안이다’라고 설정을 하고 다가갔다. 어찌 보면 소극적인 아이템이지만 그런 주제의식으로 접근한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또, KBS의 박권상 사장 취임 이후의 변화들과 그 속의 중견PD들의 노력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계는 더 컸다. 금 모으기나 실업기금 등의 각종 ARS 모금은 ‘앵벌이 방송’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더 큰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은 상당히 미흡했다.정남진 : 아픔을 달래주고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방송인들의 책임을 내부적으로 비판하는데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부분은 미흡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비판하는 자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황인수 : 경제위기를 미리 예측하고 알려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충분한 반성 없이 국민들에게 IMF 극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공허하다. 방송인으로서의 감시기능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장해랑 : 재연프로그램의 문제성도 좀 짚어야 한다고 본다. 영상이나 진실에 대해 너무 고민 없이 쉽게 넘어가는 듯하다. 또, 시사프로에 시대정신이 잘 배어나게 했는가하는 자책이 남는다. 프로그램 포맷이나 아이템 선정 등에 대한 고민 없이 여전히 그 틀을 못 벗어난 것 아닌가 싶다.권문혁(사회) : 그러면서 제기되는 문제가 ‘윤리성’의 문제 아닌가.황인수 : PD의 윤리성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수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일부 자연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어느 정도의 연출이 있었다. 그러한 관행이나 불감증에 대한 극단적인 경고가 바로 ‘수달’사건으로 나타났다. PD들이 그 단일 생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접근했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PD들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짧은 제작기간 등의 제작시스템이나 조직에서의 압박감이 너무 많다.장해랑 : ‘수달’에는 분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서식환경을 여러 번 옮겨가면서 찍는 것 등은 문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의 PD들의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우리에게 자연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의 테크닉이나 노하우가 축적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시간, 인력, 장비 등의 요소를 PD개인에게 모두 맡긴 채로 프로그램에 대한 부담을 주는 현실에서는 이런 물의가 빚어질 개연성이 충분하다. 자연다큐멘터리가 자리잡기 위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엄민형 : PD정신이 물론 중요하지만 이 제한적 여건들의 귀결은 경제력이다. BBC나 내쇼날지오그라픽 등에선 그 정도의 투자가 회수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런 경영마인드가 없다.장해랑 : 또 다른 측면에서 시사프로의 선정성이나 몰래카메라 등의 문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시청률의 압박을 못 벗어나는 듯하다. 그래서 선정적이고, 재미있게 다룰 수밖에 없는 것 같다.권문혁(사회) : 형식적이긴 하지만 제작가이드라인을 내는 등의 어느 정도 대책을 마련해보자는 분위기도 있었지 않나.엄민형 : 그러나 책꽂이 안의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PD 스스로 기획단계부터 문제를 예상하고, 대처해야 한다. 가령 어떤 프로그램이나 아이템이 기획될 때, CP가 이 프로그램에는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화두를 던지고 제작진은 이에 대해 토론하고 대비해야 한다. 우리에겐 이런 풍토가 없다.장해랑 : PD들 스스로의 건전한 비판문화와 대화채널, 토론문화의 부재가 이런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 같다. 시청률에 매일 수밖에 없는 방송사의 구조적인 틀에 빠지지 않는 것과 내부적인 PD문화를 만드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권문혁(사회) : 프로그램의 성과도 있었다고 본다. 올 한해 프로그램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해달라.정길화 : 구호로만 외쳐지던 것들이 프로그램으로 보여지는 시간이었다고 본다. <정범구의 세상읽기>나 <시청자 칼럼> 등 일부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런 고무적인 약진이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성을 공론화시킨 <구성애의 아우성>도 있었다. 많은 오락프로들이 시청률 논리 속에 빠져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21세기위원회>라든지 <좋은 세상 만들기> 등이 건전한 엔터테인먼트를 주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프로그램들의 편차가 심하고 소모적이었다. 매너리즘에의 도피는 문제다.정남진 : <정범구의 세상읽기>는 시청률의 부진으로 끝날 위기였다가 여론 선도층과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시청자들이 지켜냈다는 것들이 우리가 이야기 해오던 좋은 프로그램의 싹이 아니었나 한다.권문혁(사회) : 최근 방송개혁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내년부터 방송개혁의 회오리가 불어닥칠 전망이다. 지난 일년간의 방송개혁논의라든지 방송사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짚어달라.엄민형 : 집권 전부터 방송정책을 논의하던 역대 정권과는 달리, 현정권에서 방송정책에 대한 논의가 싹튼 것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부터인 듯하다. 현 정권은 방송에 대한 직접통제와 간접통제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도 보인다. 정권 내부에서 이견이 조정되지 않으면서 통합방송법 상정 돌연 유보, 방송청문회 실종 등의 혼선을 드러냈다. 연말에 이르러서야 방송개혁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들을 선임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정남진 : 1년간 구조조정 등의 힘든 시기를 보내다보니 방송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장치 등에 대한 관심이 시들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시기를 대처하고 감시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DJ가 정부가 방송의 형식적 독립을 보장한다 해도 또 다른 형태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유심히 지켜보아야 한다. 방송사만의 독특한 제작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의 구조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엄민형 : 매체시스템에 관한 논문이 10편도 안 되는 이런 빈약한 토대 위에선,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줄이고 기구를 줄이는 것이라고밖에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장해랑 : 지난 10여 년, 정권교체 후 또 1년 동안의 계속된 방송법 논의들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방송개혁위원회를 띄웠다는 것은 현 정권이 방송개혁의 의지가 약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말은 무성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이채훈 : 본질적으론 여느 정권과 다르지 않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방송독립은 허구일 수 있다. 디지털 방송 등의 하드웨어측면에서는 산업논리나 세계화 논리를 내세우면서 방송프로그램에서는 공영성을 말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엄민형 : 우리는 정치적인 저항에나 거부에는 숙달되어 있지만 경제적 통제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으로 유리한 경제상황을 이용하여 또 다른 제약이 취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권력은 방송을 통제해왔고 앞으로도 통제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권 등을 통한 직접적 통제에서 기술·산업적 측면이나 자본적 측면에서의 간접적 통제로 그 방법을 바꾸어갈 것이다. 내년 3월이면 그 파장이 바로 닥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응논리나 인식을 빨리 구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방송개혁위원회의 논의 과정에서 방송위원회 독립성이나 편성위원회 설치 등에 관해서는 언론·시민 단체의 주장이 많이 반영될 전망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국자본 유입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하다.권문혁(사회) : 통합방송법이 지연된 것에 대한 정권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방송개혁위원회의 구성이나 활동을 계속적으로 주시하여야 한다. 이제 내년도 전망을 밝히고 한마디씩 정리해 달라.정길화 : PD의 한 영역인 저널리스트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직도 PD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제작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언제까지 제작시스템만을 탓할 수는 없다. 또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건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 큰 그림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아티스트적 측면에서 보자면 진실성과 건강한 재미와 감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황인수 : 여전히 우리에겐 방송의 독립성이란 과제와 타율적 구조조정에 대한 과제가 남겨져 있다. 구조조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내년에는 더욱 힘이 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도 방송의 윤리적인 측면이나 도덕성들을 지킬 것은 지켜가며 스스로 자기관리를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정남진 :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송환경 제작환경에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이채훈 : 개혁이 전지전능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의 프로그램들이 그런 개혁적인 방향으로 많이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PD연합회 비평위원회에선 신문에서의 방송비평에 대한 모니터나, 정부가 진행하려는 방송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을 보이겠다.장해랑 : 우리 PD들에게 진지함과 노력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것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프로그램 발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주먹구구식의 제작방식을 좀더 과학적인 단계로 발전시킬 고민들을 해야 한다. 또 통일에 대한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사고가 요구된다.엄민형 : 방송을 자동차와 길에 비교하자면, 차가 좀 허술해도 길이 잘 닦여있다면 잘 달릴 것이고, 길이 험난해도 자동차가 튼튼하다면 역시 잘 달릴 수 있다. 각 부문에 전문가들 모여있으면 지형변화나 기능변화에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권문혁(사회) : 사회를 감시하고 전망을 제시해야할 우리의 의무가 너무나 막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긴 시간 내주어 감사드린다.<기록·정리 이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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