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pdnet@naver.com)
|contsmark0|요즘 방송계에서 가장 예민한 단어는 무얼까? |contsmark1| 필자 판단으로는 단연 게이트 키핑(gate-keeping)이다. |contsmark2| |contsmark3| 보수언론들은 방송을 비판할 때 전면에 이를 내세운다. 이번 방송사고는 팀제이후 게이트키핑이 느슨해져서 운운...하며 진행중인 개혁과 변화를 우회적으로 공격한다. |contsmark4| |contsmark5| 최근에는 한 프로듀서가 자신만이 옳다고 조직을 거부하고 제작물을 들고 뛰쳐나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이참에 게이트키핑을 강화하자는 목소리도 들린다. |contsmark6| |contsmark7| 게이트키핑은 세상의 수많은 메시지를 모두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뉴스화 혹은 프로그램화할 때 일부만을 취사 선택하는 과정이다. 게이트키핑은 정보를 수집, 취사선택하는 기자나 프로듀서에 의해 걸러지고, 편집책임자에 의해 다시 한번 거부되거나 선택된다. |contsmark8| |contsmark9| 이때 실행의 당사자인 게이트키퍼의 계급적 배경, 성장배경, 가치관, 세계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속된 조직의 가치, 규범, 전통 등 조직문화와 외부의 사회적 체계, 이데올로기, 기업광고, 국가기관 등도 요인으로 작용한다. |contsmark10| |contsmark11| 이런 요소들이 제대로 작동할 때 게이트키핑은 균형과 객관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질 때 게이트키핑은 심각한 편견과 왜곡을 낳는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우리 역사에서 수 없이 봐 왔다. |contsmark12| |contsmark13| 저 암울했던 땡전시절, 권력과 특정 정파들의 이익을 위해 게이트키핑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불방되고 짤리고 재편집되었던가. 그것은 선택, 취급을 빙자한 확실한 내적 통제의 수단이었다. 그 진행은 층층시하의 조직구조 하에 ‘자리’나 ‘연공서열’에 의한 상명하복의 일방적 통로로 이루어졌다. 기자와 프로듀서의 양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신문의 자유는 사주의 자유라는 주장이 아니겠는가. 한편으로 게이트키핑은 정략적이고도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방송 1년이 지난 다큐멘터리에서 김일성 찬가 한 귀절을 찾아내 게이트키핑의 문제라고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contsmark14| |contsmark15| 저들의 주장대로 현장의 방송사고들은 게이트키핑이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걸까? |contsmark16| 팀제 이전의 옛 국부제 때는 사고가 없었나? 팀제로 정말 게이트키핑은 약화되었는가? |contsmark17| |contsmark18| 혹 그것은 자리중심의, 명령중심의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복귀를 의미하는 건 아닌가? |contsmark19| |contsmark20|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게이트키핑 모델은 무엇인가. 자율이라는 핑계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독선과 오만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contsmark21| |contsmark22| 몇 십 년 간 지속해온 문화(마인드)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자율과 창의를 가치로 하는 새로운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고, 게이트키핑의 새로운 모델을 세우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다. 남은 숙제는 하나의 돌출된 의제가 우리 앞에 던져졌을 때 선후배가, 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롭게 수습할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게이트키핑의 약화와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순수성을 가려내야 한다. |contsmark23| |contsmark24| 게이트키핑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건강한 기자와 프로듀서가 건강한 방송을 만든다. 뉴스는 팩트(fact)중심을, 다큐멘터리는 주관적 객관을 추구하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선택되고 재해석되어 진다. 이 주체는 여전히 기자와 프로듀서들이다. 돌아보자. 제작자는 한 점 부끄럼 없는가. 고결한 양식과 양심으로 제작하고 있는가. 기자정신은, pd정신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contsmark25| |contsmark26| 장해랑/kbs pd|contsmark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