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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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를 변경하며
  • 승인 1999.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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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연합회보>의 제호가 이번 신년호부터 보시는 것처럼 로 바뀌었다. 지난 1988년 월간 타블로이드판의 <프로듀서>로 시작한 PD연합회의 기관지가 이제 또한번의 탈바꿈을 하는 것이다. 제호를 변경하는 뜻은 무엇인가. 집행부가 바뀌고 해가 바뀌니 한번 해보는 것은 아니다. 공연히 어깨에 힘을 주는 한건주의도 물론 아니다. 형식은 내용을 결정하고 이름에는 스스로를 결정하는 규정력이 있다. <프로듀서연합회보>와 는 분명히 다르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듀서연합회보>의 유달리 고풍스러웠던 제호는 우리 고전 춘향전의 목판본인 <열녀춘향수절가>의 완판본에서 집자(集字)한 것이다. 지난 1995년 4월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회보의 편집주간으로 있었다. 판형이 신문형 대판본으로 바뀌고 새로운 제호가 필요하던 그때 필자는 감히 춘향전에서 집자를 할 생각을 했다.왜 춘향전이었는가. 춘향전은 우리 소설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민중으로부터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 그러면서도 탐관오리 척결, 신분을 뛰어넘는 지순한 순애보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 필자는 바로 이것이 이 시대의 방송PD가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문화의 향도자로서 모름지기 PD가 추구해야 할 대중성과 보편성, 그러면서도 이 시대 공중파 방송사의 현업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진보성과 개혁성을 하나의 범본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대는 흘러 주막집 이야기꾼과 판소리 명창에서 육전소설로 그리고 신문소설에서 라디오 드라마로 마침내 텔리비전 프로그램으로 민중의 삶을 위안하는 표현영역은 변천해 왔다. 오늘날 PD의 문화사적 연원은 그 옛날 호롱불 밑에서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가며 성춘향이 광한루 오작교에서 이몽룡과 만나는 장면을 쓰던 이름모를 이야기꾼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뜻에서 춘향전은 PD들의 영원한 텍스트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춘향전은 다름 아닌 <사랑이 뭐길래>요 <야망의 전설>이며 <모래시계>이자 <좋은 세상 만들기>다. 진보성과 운동성을 견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춘향전의 현대적 화신은 <정범구의 세상읽기>와 <추적 60분>과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우리 PD들이 춘향전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취지로 제호를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집자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런데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진 <프로듀서연합회보> 제호를 로 바꾸는 것은 무슨 사정 때문인가 하고 물으실 것 같다. 왜인가. 대중성과 진보성이라는 PD의 덕목이 완성돼 이제 필요가 없다든가 아니면 영원한 딜렘마인 두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해 아예 포기하려는 것 등은 아니다. 연합회가 제호를 로 변경하고자 하는 것엔 격변하는 구조조정기의 방송계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우리 PD들의 현실적 고뇌가 담겨 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외주제작 비율의 의무 확대, 거대 방송사의 해체… 등등 작금의 방송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논의들은 한 분야의 전문인을 자처하는 방송PD들을 논의 과정에서 거의 배제한 채 정치논리와 산업논리로 질주하고 있다. 이같은 시비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공중파 PD의 위상이 지금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단지 시간 문제일 뿐 필경 프로듀싱과 디렉팅의 전문화, 기획과 편성과 제작으로의 분화가 진행될 것임은 장기적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추세이다. 이에 연합회는 목가적인(?) <프로듀서연합회보>의 제호를 스스로 거두고 로 자임하고자 한다. 프로듀서와 PD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PD는 통상 프로듀서로 치환될 수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로그래밍 디렉터일 수도 있고 프로듀서와 디렉터의 겸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방송환경에서는 우리 회원들이 ‘종래의 PD’(프로그램밍 디렉터)만이 아닌 실제 신분상으로 완전히 분화된 ‘프로듀서’일 수도 있고 ‘디렉터’일 수도 있음을 대비해야 한다. 방송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PD가 방송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프로그램은 PD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떠안고 가겠다는 것이 제호를 로 바꾼 참뜻이다. 정녕 이 시대의 춘향전을 만들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이제 PD들은 대중성과 진보성을 영원한 화두로 삼고 춘향전의 이상을 승화해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완성시켜야 한다. 는 그런 목표를 실현하는 논의의 마당이 될 것이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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