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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제작 활성화 말로만 안된다
금융지원·프로그램 보장 등 제도적 유인(誘引) 없이는 공염불
  • 승인 1999.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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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정수웅다큐서울 대표(전 kbs,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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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외주제작 비율 의무확대를 통한 독립제작사 활성화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본보에서는 지난 157호(98년 12월 24일자)에 전(前) kbs pd 정성욱씨의 “한국의 협소한 시장규모로 볼 때 외주비율확대정책은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이번호에는 인프라 구축을 위해 방송사나 당국의 실질적인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하는 정수웅 감독의 글을 싣는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 pd들이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려는 뜻이다. <편집자>
|contsmark3|pd연합회보 지난 호에서, 방송사 pd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항목 가운데는, 문화관광부의 독립 외주비율 상향 방침에 대해서 반대가 50.7%, 찬성이 37.9%였으며 반대하는 큰 이유로는 독립제작사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미비를 48.1%로 가장 많이 꼽았고 당국의 한건주의에서 오는 졸속성이 27.0%, 프로그램 질 저하가 10.7% 등의 순서로 나타나 있다.이 조사결과는 독립 인프라만 구축된다면 찬성 쪽이 50% 이상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데, 한국 방송계가 안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인프라 구축문제라고 생각된다. 방송은 프로그램이며 그 프로그램은 pd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방송은 곧 pd이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pd를 방송사의 단순한 종사자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pd는 변호사, 의사, 공인회계사와 같은 전문직으로 그 어느 직업에 비해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그런데 대부분의 pd들은 방송사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안정과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아가며 마치 따뜻한 온실 속에서 안주하듯이 살아가고 있다. 비독립 pd들에게 바깥 세상은 삭풍이 몰아치는 시베리아 벌판인 것이다.온실에서 뛰쳐나와 시베리아 벌판을 개간, 스스로 독립해 보고자 하는 의지의 pd들이 더러 나타나기는 하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나의 경우, 방송사를 뛰쳐나와 지난 17년간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그 해법을 찾는 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자 잠시 펜을 잡았다.kbs의 pd로 있으면서 언젠가는 프로덕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여러 번에 걸친 사표제출파동을 거쳐 일본영상기록센터(nav)의 전속감독으로 이적했다. 그 때가 1982년도였는데, 이미 일본에서는 방송프로덕션이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난 후였다.nav는 니혼테레비(ntv)의 계열사로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40명 가량 있었고 그 중에서 반수 가량이 ntv의 인기 다큐멘터리 논픽션극장을 담당하던 pd들과 스텝들이었다. 계열사란 자회사와 달리 주식의 50% 이내에서 방송사가 출연하는 형태인데, 당시 nav의 주식 배분은 우시야마 준이찌 대표 pd가 30%였으며 방송사 ntv가 30%, 그리고 나머지는 창립 멤버 pd들과 편집·카메라맨·더빙담당 등 스텝들이 가지고 있었다. ntv는 사무실도 내주었다. 자사 출신들이 가급적이면 퇴직금으로 회사를 설립하거나 운영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던 것이다.이 프로덕션의 정규물로는 <원더풀 월드>(일 저녁 7시)와 <알려지지 않은 세계>(일 밤 10시)가 있었는데, 모두 순수 다큐멘터리로 상업방송인 ntv가 이를 20년간이나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원더풀 월드>는 지구 구석구석 오지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생활을 영상인류학적으로 접근, 제작하는 프로그램으로 세계 20여개 방송사에서 정기적으로 수입해서 방영하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프로그램이 되었다.이처럼 일본에서는 독립제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방송사가 주식도 투자하고 프로그램도 장기간 보장해 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기로 하자.nav와 쌍벽을 이루던 테레비맨 유니온은 5년 앞서 창립되었다.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이다. 텔레비전방송의 대이벤트인 올림픽대회가 끝나자, 상업방송들은 운영난에 봉착했다. 우선 사원들이 늘어나 인건비에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며 방송기재들도 남아돌게 되었다. 그러자 노조운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도쿄방송(tbs)의 야마니시 사장은 그 해법을 찾으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달 가량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시찰한 끝에 프로덕션 시스템만이 일본 방송계가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사원들, 특히 pd들을 모아놓고 프로덕션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고 나가려 들지 않았다. 야마니시 사장은 프로그램 발주를 일정기간 보장하겠다, 회사 설립금도 3년 거치 5년 상환으로 대여해 주겠다 등등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안을 내놓았다. 얼마 안 있어 곤노벤과 같은 간판 pd들이 손을 들었다. 몇몇 스텝들도 뒤따라 온실 같은 tbs의 문을 박차고 황야로 나갔다. 그들은 우선 각자가 대표성을 갖는 유니온 체제로 구성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일본 최초의 tv프로덕션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이 테레비맨 유니온은 사장을 서로 번갈아 맡는 가운데 경영 능력이 우수한 사람의 임기를 더 연장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 프로덕션은 스텝이 3백명이 넘는 거대 프로덕션으로 발전해 있으며 tbs뿐 아니라 nhk까지도 발주하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통신위성(cs)의 채널까지 확보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프로덕션은 약 5~6백 개가 될 정도로 성장했으며 상업방송의 70% 가량이 외주를 주고 있다. 최근에는 nhk도 외주를 확대해 약 30% 가량이 독립제작사들 차지이다.또 하나의 특징은 인력파견 회사의 증가이다. 스텝을 용역해 주는 회사들이 방송사 주변에 늘어나고 있는 점이다. 신입 사원을 되도록 선발하지 않고 어시스턴트와 편집맨들은 용역회사에서 파견 받아 작업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정년퇴직 사원들의 재활용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 최근 경제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들은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이러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나는, 198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프로덕션을 차리기로 했다. 언젠가 일본과 같은 수준의 프로덕션으로 발전시켜 보아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동양방송(tbc)의 우수 pd로 활약하다가 해직 언론인이 된 남성우 pd(현재 kbs tv국 주간)와 정훈 pd(현재 코오롱 문화tv 전무)와 함께 서울비전이란 프로덕션을 여의도에 차렸다. 이것저것 기획서를 만들거나 청소년 다큐멘터리 영상제 등을 펼치면서 방송사의 문을 두들였다. 그러나 그 문턱은 너무나 도 높았다. 자금력도 취약해 결국 6개월도 안 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남성우 pd와 정훈 pd는 kbs로, 나는 mbc로 들어갔다. 뜻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하고 다시 샐러리맨이 되어버린 것이다.1985년 가을, 다시 한 번 기회가 다가왔다. 방송인들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최창봉 선생님의 소개로 한국화약 소속의 프로덕션을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벌그룹에 소속되는 프로덕션 체제란 역시 샐러리맨과 같은 것으로 상업화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우선 운영하는 일이 시급했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서울올림픽 등 전시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각 기업체로부터 홍보물 제작 주문도 들어왔다. 나는 아무리 어렵고 돈이 필요해도 기업체 홍보물만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년간을 퍼브릭 영상물 제작과 일본에 수출할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방송사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1988년 서울올림픽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기회가 왔다. 중국대륙을 최초로 취재하는 <아리랑환상곡>을 kbs와 계약하는데 성공했다. 독립을 선언한지 6년만에 이루어지는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취재한 테잎이 중국측 세관에 압수 당하는 바람에 kbs와의 계약일자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나는 8미리를 들고 추운 겨울 중국 동북지방으로 마치 스파이처럼 잠입해 들어가 직접 촬영하면서 어렵게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때 나홀로 제작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이어서 mbc와 특집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mbc 신임 사장이 되신 최창봉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첫 프로그램은 <포로감시원>, 그리고 이어서 <송화강의 한인들>, <쓰루가의 아리랑환상곡>과 <시베리아 한의 노래> 등으로 당시로서는 방송사 pd들이 하기 어려운 소재들이었다.1993년, 또 다시 위기가 닥쳐왔다. 정유재란 때 노예로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소년의 유럽 진출을 다룬 작품인데, 이탈리아 알비마을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코레아들이 그의 후손이 아닐는지 모른다는 의문을 결론으로 내렸다. 이 사실 때문에 방송사에서는 선뜻 구입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는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리면 별 문제가 없는데, 내 양심상 그럴 수는 없었다. 작품이 완성된지 1년 동안이나 팔리지 않았다. 프로덕션으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결국 mbc는 이를 구입해 주었다. 얼마나 고마왔던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sbs가 등장하면서 활성화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말로 프로덕션을 본격화시킬 때가 왔다고 판단해 주식회사로 체제를 바꾸어 20명이 넘는 사원들을 모집하고 일본에 연수도 시키면서 정규 프로그램을 제작해 나갔다. 사원들이 거의 제작경험이 없는 신참들이어서 수준미달 프로그램들이 속출했다. 그들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2·3년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집으로 운영자금의 부족분을 매꾸어 가면서 우수한 프로덕션을 세워나가려 했다. 그러나 사원 중에 스스로 독립하고자 뒤에서 충동질을 하는 영악한 자가 있어 이에 크게 실망하고 일단 후퇴하기로 결심했다.주식회사를 개인회사로 환원시키고 나자 남는 것은 3억원에 가까운 부채와 부가세 미납에 따른 출국금지 통보서 뿐이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한강변을 여러 번 걷기도 했었다. 마침 nhk로부터 아시아 다큐멘터리 대표작가 3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과 함께 특집 제작을 의뢰해 왔다. 그후 매년 1편씩 발주 받아 3년만에 부채를 0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1996년 6미리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자 당분간 나홀로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나가고자 결심했다. 처음 몇 번은 카메라맨과 동행했다. 지난 <미소의 실크로드>는 철저하게 나홀로 시스템으로 제작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 나의 사무실에는 사원이 없다. 전화도 용역회사에 의뢰해 대신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매 프로그램마다 고집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재에 따라 전문 카메라맨이 필요하다. 2000년 말에 kbs를 통해 발표할 예정인 <동아시아 격동 100년사>(16부작)는 우수한 카메라맨과 전문 편집맨도 두고 한중일 3국의 협력 ad들도 두어 팀웍으로 작업하려 한다.아무튼 길고도 머나먼 독립에의 길을 걸어온 것 같다. 그러나 항상 마음 속으로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가고 있다.최근 문화관광부에서 방송영상산업 진흥대책을 발표했고 방송개혁위원회가 공청회를 거쳐 그 발전방안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지상파 방송사들도 구조조정과 아울러 외주비율 상향 조정에 따른 대책을 모색하고 있으며 한국tv프로그램제작사협회도 독립프로덕션의 진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21세기가 오기 전에 방송환경을 선진화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이 이곳저곳에서 매우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어 매우 반갑게 지켜보고 있다.독립pd의 한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통해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방송사내에 있는 우수한 pd들이 독립할 수 있게끔 인프라를 합리적이고 실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아도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pd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선의의 경쟁 속에서 프로그램의 질 향상은 물론 다양화를 기하도록 하고 국제 경쟁력을 높여 우리의 프로그램을 세계 tv시장에 수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프로덕션 설립과 운영에 따른 금융지원과 프로그램 보장 등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방송사를 퇴직한 고급인력의 활용문제이다. nhk의 예를 들면 정년 퇴직한 사원들을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하고 있다. 미국의 pbs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훌륭한 pd는 50세부터라는 말이 있다. 선진국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배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그들 밑에서 도제처럼 자라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상황은 너무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다. 실제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방송의 핵심인 pd들에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확신한다.|contsmar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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