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 ’99건축문화의 해 특집 TBC다큐멘터리 <맨발의 공간, 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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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 ’99건축문화의 해 특집 TBC다큐멘터리 <맨발의 공간, 온돌>
돈·시간·인력 없는 지역 방송 PD의 다큐 만들기
김영준
TBC 보도제작국
  • 승인 1999.02.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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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1999. 1. 17.“돈 없고 시간 없는데 무슨 다큐야?” 일상에 지친 한 선배pd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게다가 인력도 충분치 않으니 ‘삼무(三無)’를 골고루 갖춘 셈이다. 며칠 전 데스크로부터 ‘건축문화의 해’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설날까지는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남질 않았는데, 아이템부터 가닥이 잡히지 않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건축! 건축? 건축….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것이 건축물인데 주제 잡기가 왜 이리 힘들지? 그럼 거꾸로 건축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없을까? 분명히 있는데도 잘 안 보이는… 뭐 그런 것. 그러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 그래. 있지…. 구들장!
|contsmark1|1999. 1. 28.“에이 김샜다.”물론, 순진하게 온돌이라는 주제의 다큐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방송에서 몇 번 온돌을 다루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다. 접근 방법을 달리 해야한다. 넘어야 할 벽은 또 있다. 한 번 불을 지피면 100일을 간다는 전설의 온돌, 아자방(亞字房). 그런데 지금은 칠불사 스님들의 수도기간이라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들학회에서도 소식이 왔다. 전통 구들집을 어렵게 찾았는데 구들을 완전히 뜯어내어 촬영하려면 닷새정도는 걸리겠고 돈도 적지 않게 들겠다는 말이었다. ‘돈 없고 시간 없는데 무슨 다큐야?’도청 문화재과에 사정을 해보았으나, 겨울에 구들 보수작업은 도저히 힘들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촬영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contsmark2|1999. 2. 1.‘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촬영이 시작되니까 바람이 매서워졌다.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승합차 안에서 스탭 회의를 했다. 차 안 가득한 담배연기. 위이이잉~. 빼꼼히 열어둔 창문틈새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설창산 아래 터를 잡은 경주 양동마을. 바람소리만 빼면 햇살이 눈부셔서 따사로와 보인다. 옛집 한 채도 살아 남기 어려운 한국의 ‘개발 신드롬’속에서 마을과 도시가 보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인지도 모른다. 수십 수백 채의 살림집과 마을길, 마을 조경까지 보존하려면 개인이나 가족적 차원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통민속마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안동하회마을이다. 그러나 하회마을에는 수많은 민박집과 식당, 공예품점들이 들어차 관광지로 탈바꿈해 버렸다. 마을구조와 중요한 건축물들은 손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랄까….양동마을은 기적적으로 살아 숨쉬는 유일한 전통마을이다. 그러나 민속마을은 아니다. 그 흔한 민속주점도 없고, 토산품 판매가게도 없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관광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입지조건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경주와 포항 사이에 있어서, 불과 30분이면 출퇴근도 가능하고 도시 문화생활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양동마을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있다.불행하게도 그게 바로 전통구들이다. 집집마다 찾아다녀 보았으나 대부분은 기름보일러로 바뀌어 있었고, 전통구들은 아예 없앴거나 있어도 실생활에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어렵게 찾은 초가집에 구들이 있었다. 이석호(81)씨 댁인데, 주생활은 안채에서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사랑채에 아침, 저녁으로 불을 피워 몸을 ‘지질 때’ 쓴다고 했다.“이 구들 내가 직접 놓았어. 어렸을 적에 기술자들이 놓는 걸 어깨너머로 봤거든. 그 때만해도 전문가가 많았는데 일제시대 지나고 나서는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지….”
|contsmark3|1999. 2. 5.몇 번이나 와 본 경복궁이었지만 궁궐 함실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내가 평소 궁궐 아궁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집이 폐가가 되는 지름길은 사람이 살지 않을 경우이다. 궁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지 않고 그저 통제만 하니까 겉은 번지르해도 죽은 집이나 다름없다. 자경전 내부를 살펴보면 아궁이에 불지핀 지가 오래되서 장판에는 온통 곰팡이가 거뭇거뭇하게 피어나 있었다. 그래서 구들학회에서는 불을 정기적으로 지펴주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다.“불 좀 지핍시다!” (pd)“에이 불날까봐 안돼요.” (관리담당직원)“아궁이는 원래 불붙이라고 있는 거요.” (구들학회장)“그래도 안돼요. 지척이 청와대인데.” (관리담당직원)파리에는 역사 관광이라 해서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아볼 수 있도록 길거리에 자판기를 설치해 두었다. 그것까지 돈을 내느냐고 항의하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경복궁은 다른 우리의 궁궐 중 하나일 뿐이고 사진 몇 장 찍어가는 곳이다. 그들에게 우리 구들의 우수성을 알려야 한다. 그게 관광상품이다.
|contsmark4|1999. 2. 18.“다큐, 잘 봤다.”새해 인사와 함께 동료, 선배pd들이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잘 봤다’는 말은 ‘잘 만들었다’와는 다른 말이다. 온돌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과 의학적인 효능, 그리고 경북지방의 온돌 유형을 밝히며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지만 시간과의 싸움에서는 결국 지고 말았다. 기획하고 공부해야 할 절대시간의 부족. 대한민국 어느 pd라도 시간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겠지만, 지역방송사 pd들에게는 천형이다. 현란한 그래픽도 없고, 방대한 스케일도 보여줄 순 없지만 그래도 지역방송사에서는 프로그램의 활로를 다큐멘터리에서 찾는다. 또 다른 활로를 찾는 건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연휴로 일상에서 조금은 활기를 되찾은 선배pd가 커피를 한 잔 내밀었다.“그거 시리즈라던데 2편 만들어야지?”“에이, 돈 없고 시간 없는데 무슨 다큐야?”|contsmar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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