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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국=배선경 통신원/ LSE(런던정경대) 문화사회학 석사

영국의 모든 공중파 방송은 ‘공공 서비스 방송’을 해야 한다. 여기서 ‘공공 서비스 방송’이란?

하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뉴스, 시사정보….(중략)
둘. 배움의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역사, 과학, 예술 그 외 각 문화 사회 분야에 대한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주고…(중략)
셋. 영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해야 한다. 영국에서 자체 제작된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이 서로 화합하고 공유할 수 있는…(중략)
넷. 영국 내외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중략)

영국 방송 감독규제기관인 오프콤의 최근 리포트는 공공 서비스 방송을 대략 네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공중파 방송사라면 뉴스도 만들고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수입 드라마 같은 것은 많이 틀면 안 되고, 하지만 가끔 해외 촬영물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뭔가 석연찮다. 적당히 무게 있고 세련되고 균형잡힌 오프콤의 문구들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과 답답함은 뭘까?

지난달 말, 영국 방송계의 큰 행사 중 하나인 에든버러 TV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맥타가트 연설의 올해 주인공은 ITV 디렉터인 피터 핀참이었다. 마크 톰슨, 루퍼트 머독 등이 거쳐 갔던 이 권위 있는 연설장에서 피터 핀참은 오프콤이 정한 공공 방송 서비스를 읽은 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엥? 오늘 저녁 TV에서 하는 게 그런거라고? 그럼 그냥 맥주집에나 가야겠다.”

그렇다면 피터 핀참이 원하는 공공 서비스 방송이란 무엇이었을까?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연설에서 그가 내내 이야기 하는 것은 한가지다. “텔레비전은 오락이다!”

▲ 피터 핀참 <사진제공=BBC>
영국 상업방송의 디렉터답다. 맥타가트 연설장에 모여든 영국 방송계의 수많은 인사들 앞에서 던진 말이 고작 ‘텔레비전은 오락이다’ 라니…. 무게도 없고 세련되지도 않고 별로 지적이게 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가볍다. 오프콤의 공공 서비스 방송 정의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사라진다. 물론 피터 핀참이 연설에서 말했던 ‘오락’은 단순한 오락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뉴스나 시사 정보 프로그램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방송 프로그램의 전 분야에 적용되는 오락이란 시청자들을 즐겁고 재미있게 해주는 모든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이다.

디지털 채널, 위성채널, 인터넷 방송, 모바일 방송 등이 거세게 힘을 몰아 부치고 있는 요즘 영국 학계와 방송계의 큰 화두 중 하나는 텔레비전의 위기다. 기동력 있는 다양한 영상매체의 등장만이 문제가 아니라 시청자 층이 잘게 쪼개지고 있는 것도 영국 방송계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영국의 20대 여성들 ? 유대계, 이슬람계, 인도출신, 아시아출신, 유럽출신, 아프리카출신 등 ? 을 어떻게 한꺼번에 묶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영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소위 글로벌 시대와 맞물린 텔레비전 방송의 위기는 여전히 학계와 업계를 들쑤시고 있다. 특히 수신료나 정부보조금 없이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공중파 상업 방송사들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 그런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는 튼튼한 수익구조를 만들기도 벅찬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피터 핀참은 텔레비전 방송에 대해 낙관적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약 1400만 명의 사람들이 <브리튼 갓 탤런트>의 최종 결선 방송을 지켜봤고, 1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2008 베이징 올림픽을 동시에 시청했다. 이런 수치는 80년대의 최고 시청률과 비교한다 해도 큰 차이가 없는 정도다.

물론 최고 시청률만으로 20여 년 전과 지금의 텔레비전 방송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문화적 선택을 할 수 있는 2008년의 시청자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여전히 텔레비전 방송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피터 핀참에 의하면, 그 힘은 방송이 주는 정보나 지식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재미와 즐거움 때문이다.

채널이 세분화되고, 매체가 다양해지고, 타깃 시청자 층이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있는 지금, 텔레비전도 함께 작아지고 있는가? 피터 핀참의 연설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방송은 지금 다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히려 힘을 키우려고 노력 중인 것이다. 그 아이디어의 중심에 바로 ‘오락’이 있다.

다양한 기호를 가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한 번에 모을 수 있는 대중매체로서의 힘을 지키기 위해 방송은 점점 ‘즐거운’ 그리고 ‘재미있는 ’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공공 서비스 방송이란 오락이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속시원했던 것도 이 말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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