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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PD의 터닝포인트]

▲ 이채훈 MBC PD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고,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의 한 장면에서 상상을 편다. 어느 술집 입구, 구걸하려고 모자를 내미는 60살 노인을 시인은 무자비하게 두드려 팬다. 아예 쓰러뜨린 뒤 묵사발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이 송장 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가진 기계 속에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 (중략)...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리고, 나뭇가지로 나를 북치듯 후려 팼다.”

보들레르는 ‘때려눕히는’ 과감한 치료법으로 늙은 거지에게 긍지와 생기를 되돌려 주었다고 ‘우울한 농담’을 던진다. 그는 거지에게 감사하며 말한다.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이 적선을 바랄 경우, 방금 제가 했던 것과 똑같이 해 주기 바라오.”

▲ 한국일보 11월22일자 1면
가난이 극에 이르러 자존심을 잃어버린 사람, 돈이 없어서 인간성이 파괴된 사람을 되살려 내는 역설적 방법이다. 우월한 입장에서 ‘적선’하는 게 아니라 흠씬 패고 두드려 맞는 의례(ceremony)를 통해 평등을 확립하고, 대등한 인간의 자격으로 돈을 나눠 주는 것이다.

한파가 몰려오면서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불우이웃 돕는다는 쪽지를 나눠준 뒤 모금함을 내미는 아줌마. ‘아이 먹일 쌀이 없어요’라고 쓴 골판지를 들고 애처러운 표정을 짓는 아줌마. 한 정거장에 한 명 꼴로 올라온다. 불황으로 복지시설에 대한 후원금이 줄어들었고,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무료 급식소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추위가 닥치니 난방비 부담이 장난 아니다.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게 분명하다.

착잡한 것은, 솔직하게 구걸하면 나으련만, 구걸의 명분을 대는 게 거짓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부처님이라면 이들에 대해 마음 가득 연민을 느끼고 일단 도와준 다음에 설법을 했겠지만, 나는 부처가 아닌지라 이들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곰곰 뜯어보게 된다. 불우이웃 돕는다며 모금함 돌린 아줌마는 얼굴에 ‘거짓말하고 있다’고 써 있다. 어쩐지 뻔뻔스런 표정이다. 아무 것도 안 준다. ‘아이 먹일 쌀이 없다’는 젊은 아줌마를 보니 대뜸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1,000원을 준다. 그런데 팔겠다고 들고 나온 과자를 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냥 돈만 날름 집어 들고 간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다. 온 세상이 명박스럽구나…. 괜히 돈 줬다는 생각에 떨떠름해진다.

이어서 남자 장애인 한명이 올라온다. 걷는 게 불편해 보이고 얼굴에 화상이 있고, 말을 제대로 못 한다. 안산의 복지시설에 있는데 먹을 게 없어서 거리에 나왔다는 글을 돌린다. 그러더니 열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웅얼웅얼 읽는 게 아닌가. 순간 복잡한 느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얼굴 보는 것도 착잡한데 이 처참한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무릎을 꿇는 이 신파 쇼는 다 뭐냐?’ 다른 한편으로는 ‘아니, 그래도 얼마나 불쌍한가, 이 사람 보고 속으로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아!’ 혼란스러워진다.

순간 보들레르의 <거지를 때려눕혀라>가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로 때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좋은 방법이 뭘까 생각해 본다. 1,000원을 주며 말을 붙여본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인다. “바닥에 무릎 꿇지 마세요.” 그러지 말라고 손짓으로 또 한번 강조한다.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가 없다. 절룩거리며 다른 칸으로 걸어간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구걸은 죄”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도 기부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기부 받는 사람의 자생력을 퇴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큰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제 가난이 도를 넘어 집단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다. 모두 도둑이고 모두 거짓말을 하니 거지까지 거짓말을 한다. (아니, ‘거지’와 ‘거짓말’, 어원이 같은 건가?)

문명화되고 민주화되었다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다. 부처와 예수 당시에도 거지가 많았다. 하지만 2,000년 넘게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말을 점점 믿기 어려워진다. 구걸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는 걸 막을 대책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자선도 일단 필요하겠지만 결국 복지 체제를 잘 세우는 것이 궁극적 해결일 터. 하지만 모든 게 거꾸로 가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이 정권은 굶주리는 북측 어린이들 먹이는 것도 내키지 않는 듯 “먼저 도움을 청해야 주겠다”지 않았는가. 그들을 일단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예의 바르게 도와주기는커녕 “구걸해야 주겠다”며 먼저 거지가 될 것을 요구한 게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시한 보들레르와 정반대의 태도 아닌가. 진정 거지만도 못한 부자들이다. 
    

▲ 경향신문 11월22일자 26면
통기타를 든 남미 젊은이가 열차에 올라온다. 순간, 승객들 얼굴에 짜증이 스친다. 이제는 외국 사람까지 구걸을? 이 친구, 코스타리카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더니 노래를 시작한다. 시끄러울까봐 낮은 소리로 고국의 멜랑콜릭한 선율을 부른다. 그런데, 정말 잘 한다! 기타 솜씨도 프로 수준이다. 승객들 얼굴이 누그러진다. 젊은 여성 두어 명은 고갯장단을 치며 흥겨워하는 표정이다. 노래가 끝나니 박수가 나오고, 그는 한 곡 더 부른다. 이번엔 경쾌한 가락이다. 기차 안이 환해진다.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친다. 코스타리카 친구, 애교 있게 모자를 벗더니 승객 앞에 내민다. “참 잘 한다”고 칭찬하며 남은 잔돈 500원을 건넨다. 돈이 적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고맙다’며 활짝 웃어주는 그의 예의바른 태도에 마음이 놓인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그의 애교가 여러 사람 기쁘게 했다. 지하철 안에서 2,500원, 담배 한 갑 날렸다. 담배를 좀 줄여볼까 생각해 본다. 지금 모두 어렵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대책 없는 이 시대, 유머가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믿어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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