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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04년 말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전국의 회원 방송사 PD 3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정당 지지율에서 민주노동당 32.5%, 열린우리당 23.2%, 한나라당 6.7%로 나온 것이다.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야, 한국 PD들 매우 진보적이네!’ 그렇게 보아야 할까? 그렇게 볼 점도 있겠지만, PD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더 냉소적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게 옳으리라. 이 경우의 냉소주의는 현실, 특히 사회 각계 엘리트집단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전문가로서 현실의 어두운 면에 대해 갖기 마련인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선 진보주의와 냉소주의의 경계가 명확치 않아 냉소주의자가 진보주의자로 오인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내가 최근에 쓴 <왜 언론은 냉소주의에 빠져드는가?>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기자와 PD의 ‘아비투스(습속)’를 비교 평가하는 건 무모할 수 있지만, 술좌석 담론 수준에서 자유롭게 말해보자면 PD가 기자보다 더 냉소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폴리널리스트(polinalist: politics+journalist)라는 말은 있어도 ‘폴리피디’라는 말은 없다는 게 주요 근거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은 늘 전체 국회의원의 10%를 넘는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선 44명(16.1%), 2004년 제17대 총선에선 42명(14%), 2008년 제18대 총선에선 36명(12%)이었다. 18대 의원 36명을 언론사별로 보면 KBS 6명, MBC 5명, 동아일보 4명, 중앙일보 4명, 조선일보 3명, 한국일보 3명, SBS 3명, 한겨레 2명, YTN 경향 서울 헤럴드미디어 한국경제 경인일보 출신은 각 1명씩이다.

▲ 서울신문 2월12일자 24면.
국회의원이 되려고 시도를 한 언론인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제18대 총선의 경우 언론인 출신 공천자의 수는 64명이었는데, 공천 탈락자와 그 비슷한 수준에서 포기한 수까지 합하면 100여명은 되지 않을까? 늘 꿈은 꾸고 있지만 여건상 시도하지 못한 잠재적 폴리널리스트의 수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폴리널리스트는 전체 기자 수에 비해 극소수인데, 그게 기자의 아비투스를 말해줄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폴리널리스트로 전직한 이들은 기자 시절에 무능력했던 이들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매우 유능했던 이들이다. 언론과 정치의 공통된 속성이 ‘권력지향성’이라고 한다면, 폴리널리스트는 전직을 했다기보다는 출입처를 바꾼 건지도 모른다. 권력지향성은 기자 아비투스의 핵심이며, 폴리널리스트는 이걸 입증해주는 드라마틱한 사례라는 게 내 생각이다.

PD라고 해서 권력지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자의 수준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권력지향성이 강한 기자가 더 냉소적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법 하다. 여기서 나는 권력지향성을 꼭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건 아니라는 말로 답을 대신하련다. 아무리 썩은 정치일망정 정치엔 열정이 있다. 그 열정이 개인적인 출세 욕망이더라도 거기엔 냉소로 환원할 수 없는 적극성이 있다.

기자는 조직의 졸(卒)일망정 대외적으론 1인 사업자다. 반면 PD는 대내적이건 대외적이건 늘 자신이 이끄는 팀과 조직의 운용 역량에 의해 평가받는다. 그 일은 세속적 문법에 충실할 걸 요구한다. 세속적 문법의 어두움을 고발하는 일을 할 때에도 그래야만 한다. 명확하거나 충분한 권력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1인 사업자의 순발력으로 뚫을 수 없는, 종합격투기다. 이건 냉소로 굳게 무장하지 않고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
나는 냉소주의를 비교적 옹호하는 편이다. ‘비교적 옹호’라 함은 냉소주의가 좋다거나 바람직하다고 보진 않지만 개인의 ‘자기보호 메커니즘’으로서 불가피한 점이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한국엔 PD에 근접하는 냉소집단이 있으니 그건 바로 대중이다. 종합격투기를 해야 하는 삶의 환경이 비슷하다. 개혁․진보 정치가 늘 실패하거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건 대중의 냉소를 오판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냉소를 보이고 있음에도 자기 마음에 들면 ‘진보성’,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수성’으로 오인한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냉소주의의 무진장 보고(寶庫)는 지방이다. 냉소는 나의 힘, 나의 경쟁력이다. 냉소의 벽에 도전했다가 쓰러진 시체들이 즐비하다. 그 시체들의 유언집을 모아 책으로 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잘 하는 일인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는다. 냉소에 대한 부정이 아름다운 것인지 냉소에 대한 긍정이 아름다운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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