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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남내원 EBS 〈다큐프라임〉 PD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축구부로 유명했다.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수차례하고, 국가대표선수도 여럿 배출한 축구명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반 축구부 친구들은 졸업앨범에만 존재하는 유령이었다. 내 곁에 그들은 없었다. 그들은 내 ‘친구’가 아니라 그냥 ‘축구 선수’였다.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볼이나 열심히 차”라는 말에 그들은 정말 볼만 열심히 찼다. 그리고 혹시나 다른 아이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교실에 들어와서는 엎드려 잠만 잤다. 잠자다 지치면 유령처럼 스르르 일어나 교실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랬다.

▲ 경향신문 2월23일자 10면
2009년 2월. 20년 전 기억이 현실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너 시험 치면 우리 학교 성적 떨어져”라는 논리로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운동부 학생들이 제외되었다. 특수학교 학생들은 애당초 시험 볼 기회조차 없었고, 몇몇 친절한 교장선생님은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시험대신 체험학습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래도 20년 전보다 나아지긴 했다. 그때는 교장선생님이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해 이렇게 개별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보이지는 않았으니.

“이젠 운동선수들도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야한다” 하지만 이 명제는 성적 결과에 따른 교장 선생님의 인사고과 점수와 교육예산 차등지원 앞에서 거짓 명제가 되어버렸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시험문제만 잘 푸는 학생이 아니라,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 예술적인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대통령의 라디오 담화도 총론은 옳지만 현실에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학교, 우리 지역의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앞으로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을까? 성적 조작을 개인적 차원의 실수로 무마해 넘어가려는 전라북도 교육청의 비도덕성도 어디선가 많이 보고 듣던 논리다. ‘학력 미달자 없이 모두가 공부 잘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임실군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 앞에선 노래 가사처럼 ‘♬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

▲ 남내원 EBS 〈다큐프라임〉 PD
인정하기 싫지만 교육문제를 둘러싼 2009년 현재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수준은 딱 이 정도다. 내 아이, 내 학교, 내 지역의 성적을 위해서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그 뿐이라는 심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배제되어도 좋다는 논리.
시험 관리를 철저히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철학의 부재. ‘기초학력미달’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운동만 하라고 시험 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성적 조작이라는 ‘기초도덕성미달’로 화답했다.

“오늘 저번에 본 일제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다 표준미달이다. 이런!! 학교에선 나보고 의무보충, ‘야자’ 하란다. 짜증난다. 나는 수영을 더 잘하는데!!”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커있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보고 듣고 배운 걸 2009년에 반복해서 토해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이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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