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D의 눈] 남내원 EBS 〈다큐프라임〉 PD

1. 얼마 전 EBS 사내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조그마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청와대 정문을 통해 100만 달러가 전달된 전례는 40여 년 전에도 한 번 있었다. M16 소총의 구매를 결정한 한국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 무기 구매회사의 중역이 100만 달러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대통령은 100만 달러를 나 개인이 쓸 수 없으니 그 금액만큼의 무기로 바꿔달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무기회사의 중역은 대통령의 얼굴에서 어느 작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아버지, 즉 국부(國父)의 모습을 보았다. 애국심과 청렴,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전임 대통령이 주는 ‘감동’의 코드는 노무현이 주는 ‘치사함’과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물론 이 글은 실명이 아닌 아무개의 필명으로 게재되었고,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 어느 포털에 올라온 글을 옮겨온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비판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 한겨레 5월1일자 1면.
2. 며칠 전 일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자식은 처음부터 그랬어.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대통령이라고. 처음부터 불안했어. 뽑아줘선 안될 놈을 대통령에 뽑아줬으니….” 이야기는 탄핵과 386의 부도덕함, 북한 퍼주기로 짧은 순간에 옮겨갔고, 웃고 떠드는 어르신들을 뒤로한 채 촬영장에 들어섰습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그 곳. 바로 그 곳에 노무현이 있었습니다.

위의 두 의견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건 개인의 자유겠지요. 문제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입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 자는 어느 순간부터 그 보다 훨씬 많은 상징을 내포한 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노무현은 조선일보와 싸우고, 지역주의와 싸우고, 기존의 정치 질서와 싸우던 개혁과 비주류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표를 던졌고, 탄핵 국면에서 촛불로 그를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말로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진작 알아봤다는 듯 악담을 퍼붓고, 그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약자인 ‘노사모’는 ‘노무현은 사라져야한다고 믿는 모임’으로 희화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신당한 연인처럼 노무현을 바라봅니다. 조금은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 남내원 EBS 〈다큐프라임〉 PD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지난 5년의 부정이라든지, 10년 좌파 세력에게 피눈물로 참회하라고 윽박지르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노무현이 상징했던 가치들이 그가 떠나버린 이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그가 남긴 신뢰의 위기, 배신당한 희망을 어떻게 극복할지로 모아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비난했건, 그를 지지했건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의 덫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의 숙제가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노무현을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그의 지난 과거에 대한 지지와 애정이 담긴 말입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진짜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을까요? 아니면 일방적인 사랑이었나요? 지지는 철회하지만, 그를 믿었던 마음만은 순수했다는 자기변명을 던져봅니다. 그리고 그를 비난하기에 앞서, 지난 5년간 나는 무엇을 했는지 조용하게 반성해야겠습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