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3일 앞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 편집실에서 날밤을 새고 있는 와중에 기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적절치 못한 시기에 글을 쓰게 된 건 최근 회사의 개편 때문이다. 얼마 전 MBC 봄 개편에선 목요일 밤 11시에 방송되던 〈불만제로〉가 수요일 저녁 6시 50분으로 이동했다. 원래 초저녁에 방송되다 성과를 인정받아 전국 방송 시간대로 진출했고,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던 프로그램이 왜 다시 시청자수가 적은 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한동안 사내는 항의와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개인적으로 난 〈불만제로〉에 배치돼 이제 2편 밖에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월 26일 가정용 정수기의 문제점을 지적한 ‘정수기의 속 깊은 비밀’편도 이번 시간대 이동과 관련해 함께 언급되고 있단다. 편집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던 취재과정
지난 취재가 별났던 건 일찌감치 만나자고 한 적도 없는 업체 관계자가 연락을 해올 때 부터였다. 언론사에 정보원이 많다던 그 홍보 관계자는 우리 팀 취재 작가를 알아내 개인 휴대폰으로 연락, 정보를 캤다.
여기까지는 언론 플레이를 잘하는 기업체를 취재한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이 기업은 방송 직후 4월 예정됐던 광고비를 삭감했다. MBC엔 8억 원의 광고 수익에 차질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가뜩이나 광고판매가 부진한데, 사내에선 원망 섞인 앓는 소리도 났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건 공중파 3사에 동시에 취한 조치라곤 했다. 개인적으론 해당 기업의 자숙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정수기편이 파장이 컸다면 문제가 된 기업과 제품을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고 정확한 회사와 제품명을 공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정을 내린 데는 소비자로서 이런 경험이 있었다.
지난 2008년 난 연수차 일본에서 지냈다. 그 당시 TV에서 편의점에서 가끔 사먹던 보리차 음료에 유해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리포트에선 상품의 이름이 선명히 보이는 사진을 상당히 오래 화면에 노출했다. 마치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 상품은 사드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듯 말이다. 그날부터 이 음료수를 보면 구매를 피했다. 정말 소비자인 내게 필요한 정보가 전달됐구나 싶었다.
〈불만제로〉는 지금껏 소비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커텐 뒤에서 부도덕한 얼굴로 영업하는 사람들을 취재해 왔다. 업계를 정화시키고 흡인력 높은 공익 프로그램으로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한 가지 뼈아픈 지점은 왜 그렇게 어렵게 취재를 해놓고 그 정보를 소비자에게 공개하지 않느냐는 시청자들의 지적이었다. 나 역시 시청자로서 실질적인 정보가 궁금했지만 프로그램을 보고도 뭘 조심해야하고 뭔 괜찮은지 알 수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업체의 영세성, 과실의 내용, 그리고 취재 과정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예외가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기업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 소비자에게 중요한 정보가 되는 상품과 기업명은 공개하는 게 원칙이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남겨진 또 한 번의 방송
그리고 또 얼마 후 경쟁력과 공영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자부했던 〈불만제로〉는 제작진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밤 11시대 자리를 내주고 저녁 6시 50분으로 밀려났다. 편성 측에선 어떤 합리적인 설명과 답변도 없었다. 저녁 6시대에 방송되던 재방 역시 보는 사람이 없는 낮 12시 40분으로 이동됐다. 광고국의 요청이라는 짤막한 설명만이 있었다.
5월 6일, 학교 정수기 문제를 다룬 〈불만제로〉 정수기 2탄이 방송된다. 1편을 만들 때 보다 훨씬 힘겨웠다. 그러나 더 거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했다. 취재 대상이 된 한 기업에선 거액의 협찬을 내세우며 ‘선처’를 호소한다고 한다. 물론 지금 나는 반론은 충분히 듣고 어떠한 사실 왜곡도 없다는 원론적인 답변 외엔 할 것이 없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기업의 달콤한 제안이 제작진에게 어떤 압박으로 가해지는 무서운 때가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다시 로컬방송이 되면서 1/4로 줄어든 시청자 중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보고 문제점을 공유해 주길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