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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국민의 방송'은 어쩌다 '국민에게 외면받는 방송'됐나?

불과 10개월 전이다.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고봉순을 지켜내자”고 외쳤다. 고봉순은 마봉춘(MBC), 윤택남(YTN)과 더불어 정권의 언론장악에 맞서 싸우던 KBS를 위해 누리꾼들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당시 시민들은 정연주 전 사장 해임을 통해 KBS를 장악하려는 정권의 움직임을 규탄하며 “공영방송 KBS를 지키자”고 외쳤다. 수년간 신뢰도·영향력 1위를 차지하며 쌓아온 국민들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 지난해 8월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시민들은 '공영방송 KBS를 지켜내자'며 촛불을 들었다. ⓒPD저널
하지만 지금의 KBS는 기자·PD가 시민들로부터 취재를 거부당하고, 현장에서 중계차가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직접적인 원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KBS가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데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KBS의 변화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사장 취임 이후 KBS는 보수세력이 ‘편파방송’이라고 지적하던 시사 프로그램을 잇달아 폐지했고,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주례연설 등을 편성했다. 뉴스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현격히 줄면서 KBS는 ‘정권편향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신뢰도와 공정성에 크게 타격을 입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면서 KBS는 ‘고봉순’ 대신 ‘김비서’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비서’ 노릇을 하고 있다는 누리꾼들의 조롱이다. 이쯤 되면 공영방송을 ‘국정 파트너’ 쯤으로 생각하는 정부·여당의 인식이 어느 정도 ‘공감’을 산 것 같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기본적인 취재마저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르자 KBS 내부여론은 들끓었다. 사내 게시판, 기자·PD협회보에는 “KBS라는 것을 숨기고 취재를 해야 했던” 씁쓸한 토로와 자성이 이어졌고, 불만은 결국 이병순 사장의 시청자사과 요구와 보도·편성본부장 등에 대한 불신임투표로까지 번졌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KBS 취재진들은 추모현장 곳곳에서 취재거부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사진은 '봉하마을 취재 수난기'를 담은 KBS PD협회보.
하지만 이병순 사장을 비롯한 KBS 경영진은 기자들이 취재를 거부당하는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내부 구성원들의 책임자 문책 요구가 잇따르고 있지만, 경영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노사 공방위에서 김성묵 부사장이 “책임질 일이 있다면 자체 건의해 책임을 묻겠다”고 답변한 게 전부다.

내부 반발 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 서거방송 이후 바닥까지 추락한 KBS의 신뢰도를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추모열기를 편파·축소하려는 정권의 요구에 편승했다”는 안팎의 비난에 KBS가 내놓은 답은 고작 “지상파 3사 가운데 서거 관련 방송시간이 가장 많았다”는 빗나간 해명뿐이었다.

KBS가 ‘정권의 나팔수’에서 ‘국민의 방송’으로 인정받는 데는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지만, 국민의 ‘고봉순’이 정권의 ‘김비서’로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신뢰도를 회복하려면 KBS 구성원들은 또 다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이병순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에게는 KBS가 정말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공영방송이라는 데 동의하는지 묻고 싶다. 혹시 지금처럼 ‘공정·공익’을 표방한 정권의 ‘김비서’ 역할이 진정한 공영방송의 역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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