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송 따져보기]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고 장자연 씨의 자살은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는 자살의 사전적 정의와 맞지 않다. 사실상의 타살이자 사회적 자살이었음을 알려주는 정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허나, 문제는 죽은 이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애써 개인의 죽음으로 축소하려는 이들에게 정황 이상의 물증을 내놓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밝히고 알려야할 이들이 책임을 방기하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검경의 날은 무디고 득달같던 언론의 펜은 뭉뚝하다. 그 와중에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죽음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 원통함은 죽음을 핑계 삼아 소리 없이 묻히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단지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 중 하나로 치부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될 운명에 처해 있다.

▲ 경향신문 7월11일자 8면.
하지만 개인에서 구조로 문제를 옮겨오면 남겨진 자의 숙제는 상당함을 알게 된다. 문제는 비극의 내용이 아니라 비극의 반복이다. 고 장자연 씨는 비극의 고유 명사가 아니라 비극의 보통 명사이다. 비록 고 장자연 씨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원통함을 묻어두고 감내해야만 했던 수많은 연예인들이 앞서 있다.

이들의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이를 통해 우리는 개별 인물과 내용은 달라질 수 있으나 비극은 같은 형식으로 주기적으로 반복됨을 확인한다. 연예인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대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단언컨대, 비극은 되풀이된다. 더 많은 상품의 유통, 신속한 자본의 회전을 위하여 소모적으로 연예인을 착취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비극에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구조를 개선하는 행위이다.

▲ 조선일보 7월13일자 23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를 발표하였다. 지나친 장기 전속 계약과 과도한 위약금을 금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연예인을 상품으로 대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1%의 성공하는 사람들과 99%의 실패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구조도 변화가 필요하다. 많은 연예인들이 인권 유린을 감내하고 이에 순응하는 이유는 성공했을 경우 얻을 부와 명성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부와 명성에 대한 사회적 재분배를 제안한다. 연예인협회가 기금을 조성하고 성공한 연예인들이 여기에 상당한 물질적, 심적 기여를 하여 다시는 힘없는 신인 배우·가수들이 필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익단체로서 제 목소리를 내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사회적 지지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송 제작자 또한 연예인을 대하는데 있어 보다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인권은 계약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의 존중은 일상적인 실천으로부터 구체화되어야 한다. 최근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연예인들끼리 서로를 헐뜯고 막 대하며 경쟁적으로 사생활을 폭로하는 모습이 잦다. 가학적·피학적 상황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연예인들로부터 웃음을 얻어내기도 한다.

▲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성적 상품화 또한 오랜 이야기다. 상당부분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자들로부터 눈도장을 받으려는 방송제작자의 욕심 탓이다. 이 와중에 연예인들의 인권은 일상적으로 침해받으며 시청자들의 인권에 대한 감각도 무뎌졌을 것이다. 이러한 관행에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 연예인 자신의 노력, 방송 제작자의 각성, 인권존중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비극의 반복을 멈출 수 있다. 고 장자연 씨에 대한 남겨진 자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