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사태’가 장기화 할 태세다. 임원 선임을 둘러싼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김우룡·방문진)와 엄기영 MBC사장의 힘겨루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방문진은 엄 사장의 인선안을 수용할 의사가 없고, 엄 사장 역시 ‘사퇴 시사’ 발언을 하는 등 배수의 진을 쳤다.
양쪽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갈등하고 있지만 ‘의도’와 ‘진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엄기영 사장. 지난 21일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엄 사장은 보도·제작·편성·경영본부장 등 각 본부장별로 2~3명의 후보를 제시했다. 하지만 경영본부장 인선안을 제외하고 모두 거부당했다. MBC 사장이 제출하는 임원 인선안에 대해 방문진이 동의해왔던 관례를 생각하면 굴욕이다. 그런데 엄 사장은 두 번이나 거부당했다. 이건 전례가 없는 굴욕이다.
엄기영 사장의 ‘진의’는 대체 무엇일까그런데 이 굴욕, 충분히 예상됐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엄 사장이 이런 굴욕을 감수하고 방문진의 재신임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했다. ‘김우룡-엄기영 사전교감설’까지 제기된 상황에서 방문진의 엄 사장 재신임은, MB정부와 방문진을 향한 엄 사장의 ‘백기투항’이었다. 자신이 먼저 사퇴서를 제출하고 주요 임원들이 경질되면서 얻은 재신임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일 수 없는 이유다. 오히려 지금 벌이고 있는 그의 ‘결사항전’이 예상치 못한 변수다.
엄기영 사장의 ‘진의’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MBC의 한 관계자는 “통상 이 정도 모욕을 당하면 사퇴하는 것이 수순”이라면서 “하지만 MBC 안팎에서 사퇴에 무게중심을 두는 이는 아직 소수”라고 말했다. 엄 사장이 ‘식물사장’이라는 내외부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직 방문진과의 논의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는 얘기다.
이 논의 잘 될까. 가능성이 없다. 방문진이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두 번이나 사장이 추천한 임원안을 부결시킨 의미가 뭘까. ‘백기투항’에서 ‘결사항전’ 태세를 보이고 있는 엄 사장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그렇다. 지금 방문진은 ‘엄기영 사장’을 주요변수가 아닌 종속변수로 판단하고 있다. 방문진은 이미 ‘상처가 날 데로 난’ 엄기영 사장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엄기영 사장의 사표를 반려한 것은 그를 재신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제 발로 걸어 나가게 하려는 야비한 음모”라는 MBC노조의 성명(21일)은 방문진이 겨누고 있는 칼끝이 어디인지를 짐작케 한다. 부담스러운 강제퇴진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되, 엄 사장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겠다는 것 아닌가.문제는 현재와 같은 사태의 장기화가 엄기영 사장은 물론이고 MBC구성원에게도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MBC 안팎에선 엄 사장이 자진사퇴하지 않더라도 내년 2월 주총에서 사장교체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엄기영 사장의 ‘진의’는 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