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그냥 허들링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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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아내와 아이들이 나가고 남은 공간은 적막하고 평화롭습니다. 어떤 땐 전화벨이 한참을 울려도, 스스로 꺼질 때까지 부러 받지 않기도 합니다. 나의 시간과 공간을 불쑥 침입해 오는 것들을 뿌리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이게 병이 되면 어쩌지’ 하면서도, 이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쩌다 처하게 된, 고립과 단절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전화는 또 그렇게 불쑥 왔습니다. 한 번 와서 말씀 좀 주세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저 쪽의 목소리는 제법 씩씩했습니다. 신문사 파업현장이었습니다. 5층 복도에는 백 명이 채 안돼 보이는 조합원들이 이제 막 긴 겨우살이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국민일보사였습니다. 교회를 일구고, 돈을 일구고, 그것을 왕조처럼 세습하는 부조리가 아무런 사회적 제제도 받지 않는, 참으로 불의(不義)한 현장이었습니다. 저는 말을 하기 위해, 복도에 앉은 조합원들 사이를 헤쳐 앞으로 나가는 아주 짧은 그 시간 동안, 제겐 이기적 즐거움일 수도 있었던 고립과 단절이 이들에게는 또 얼마나 큰 외로움이며 불안일까 하는 생각에, 그저 오는 것만으로 잘한 일이라고 자위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별다른 지혜가 아니라 그저 작은 위로였으면 했습니다.

▲ ‘허들링’(Huddling)은 영하 50도에 이르는 남극의 눈폭풍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황제 펭귄들이 몸을 밀착하는 집단 행동이다. 사진은 지난 6일 방송돼 화제를 모은 MBC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 방송 장면.

집에 와 TV를 봅니다. 1년 동안을 남극(南極)의 혹한과 싸우며 만든 프로그램이라 기다려서 봤습니다. 사람들과의 고립과 단절을 견뎌내며 건져 올린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하 40도 속에서 살아가는 펭귄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허들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수 백 수 천 마리의 펭귄들이 원형으로 줄을 맞춰 서로 안팎을 바꿔가며 체온을 유지하는 행위. 그들의 생존투쟁은 설령 본능에 따른 것이라 해도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무척 화가 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펭귄 무리 주변을 배회하는 새. 전 처음에 그 게 갈매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끼룩대며 한 여름의 해변을 날거나, 고깃배의 뒤를 쫓으며 먹잇감을 찾거나, 아니면 여객선에서 던져주는 새우깡이나 받아먹는, 그런 새. 그러나 이놈은 아니었습니다. 자이언트 페트롤. 어린 펭귄을 잡아먹기 위해 정수리인지 목덜미인지를 집요하게 물어뜯는 잔인함이라니요.

어디에든 이런 놈들은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저는 제 머리통을 물어뜯기는 느낌 때문에 보는 내내 참 고통스러웠더랬습니다. 화가 났더랬습니다. 덩치도 크고, 부리도 크고, 숫자도 많은 어미 펭귄들은 자기 새끼가 물어뜯기는 상황에서도 왜 바보마냥 버벅거리면서 결국에는 새끼가 끌려가는 상황을 왜 막지 못하가. 허들링의 지혜는 대체 어디에다 내팽개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가.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우리에게도 혹한의 시간, 그리고 고립의 시간은 아직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문사 사옥 복도에 줄지어 앉아 있던 조합원들과, 눈보라 속에서 허들링하는 펭귄들이 자꾸 오버렙됩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그 눈보라 속으로 자이언트 페트롤에 뒷덜미를 물린 새끼 펭귄의 처연한 모습과 안절부절하는 어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체온과 체온이 만나서 영하 40도를 견디는 풍경도 보입니다. 고립과 공존의 경계를 쉽사리 넘지 못하는 게 인간사 인지상정이지만, 저 펭귄들이 보여주는 무기력과 연대를 동시에 보면서, 우리 인간은 너무 복잡한 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겨울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그냥 허들링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선택인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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