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愚)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슬립이 대세다. <옥탑방 왕세자>를 필두로 <인현왕후의 남자>, <닥터진>, <신의> 등 과거에서 현재로, 2012년에서 고려시대로, 시공을 초월하는 드라마가 유행이다. ‘퓨전’이라는 장르가 몇 년간 회자되더니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양복입고 조선의 시전거리를 활보하는 드라마가 방송된다. 사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옥탑방 왕세자>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한 드라마 관계자는 거의 없다. 판타지 장르가 전무후무한 우리나라에서 ‘시간여행’이라는 황당한 이야기가 먹힐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타임슬립은 이제 대세가 됐다. 과거 할리우드의 ‘백 투 더 퓨처’에 열광했던 시청자들은 이제 우리의 안방극장에 시공간을 오가는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에 매료될 것이다. 그게 가능한지, 현실성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미 하나의 개념이고 ‘프레임’이 됐다.

‘종북’이라는 단어가 월간 최대 검색어가 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종북’이 유행한다. 통합진보당 선거부정 사태를 거치면서 생겨난 이 단어는 이제 보수 세력들의 전가의 보도가 됐다. 민주당과 개혁 세력들은 종북의 불세례를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나는 종북이 아니다’ 만으론 안 된다. ‘나는 종북이 싫어요’ 라는 강력한 신념의 표출이 필요하다.

얼마나 궁색하면 야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종북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엄청난 자살골이다. ‘종북’은 60년 이상을 우려먹은 ‘빨갱이’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성과 후진성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강력한 ‘프레임’이다. 2012년의 대선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초대형 태풍이다.

답답한 현실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 발칙한 상상을 한 번 해 보자. 진보 개혁세력은 이제 그만 ‘해야만 한다(must)’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어릴 때부터 세뇌 받아온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자.

이미 분단된 지 60년지 지났고, 우리네 대다수는 한 번도 통일된 나라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대판 싸우고 별거한지 60년인데 왜 지금 와서 우리가 다시 합쳐 살아야 하는지. 그냥 미국, 일본, 중국처럼 다른 나라로, 이웃나라로 지내면 안 되는지.

반만년 역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민족의 피가 섞인 단일민족(?) ‘프레임’에서 해방된다면, 북한에 배낭여행도 가고, 어학연수도 가고, 동남아 노동자들처럼 북한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고 북한 여성이 우리네 농촌 총각과 결혼하는 현실이 조만간에 펼쳐지지 않을까. 제발 통일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자.

‘공영방송’ 이란 프레임에서도 벗어나자. 언제부터 KBS, MBC가 공영방송이었나. 아니 한번이라도 공영방송이었던 적 있나. 50년 방송역사에서 45년 이상은 어용방송, 편파방송 아니었나. 사실 국민들도 공영방송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국영방송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KBS도 ‘수신료 현실화’라는 궁색한 표어보다 ‘수신료 전면 폐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전면에 내걸면 어떨까. 수신료를 없애고 광고로만 운영하겠다, 더 이상 시청자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 아마 당장에 전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것이다. ‘부자증세’라는 부정적인 정책보단 ‘서민감세’라는 긍정적 구호는 어떨까.

▲ 송현욱 KBS 드라마 PD
발칙하고 도발적인 상상이 필요할 때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마을사람들이 단합이 잘 되는 이유를 묻자, 이장이 “마이 묵어야지, 마이” 라고 했던 명장면이 생각난다. 여당은 총선 승리를 위해 전통적인 파란색에서 금기시하던 ‘빨간색’으로 로고도 바꿨다. ‘빨갱이’를 폐기하고 ‘종북’이라는 구원투수를 투입했다.

‘옥탑방에 사는 조선의 세자’도, ‘흥선대원군과 조국의 미래를 논하는 대학병원 외과의사’도 가능한 시대가 됐다. ‘고정관념’을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또 범할 것인가.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