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커버스커 장범준의 ‘보이스컬러’는 매력적이다. 흡사 동아리방 문을 삐걱 열자 먼지가 부유하는 역광을 배경으로 기타치고 있는 (심지어 눈인사도 건네지 않는) 동아리 오빠를 목소리로 구현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목소리만으로 소구하는 바가 분명 있다. 더 높이 사야할 것은 그는 자신의 매력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인데, 그가 작사한 가사들은 그의 목소리 분위기와 환상적으로 어울리며 가공할 만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오오오! 그런데 왜 〈슈퍼스타K 3〉에서 2등한 거야?
장범준은 애석하게도 ‘고음처리’가 안 된다. 〈슈퍼스타K 3〉 심사위원들에게서 꾸준히 지적 받아온 부분이기도 하다. 보컬에게 ‘고음불가’란 얼마나 치명적인가. 서바이벌 프로그램별 지원자가 100만 명을 넘는다는데 그 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뮤지션들이라면 다들 1등이 된다해도 무리가 없는 실력자들일 것이다. 실력자들 간의 탈락과 합격의 모호함 속에 고음불가와 같은 단점이란 얼마나 명징한 탈락 이유가 될 것인가! 각자가 가진 매력의 크기를 비교하고 누가 더 훌륭한 음악을 하느냐를 가리고 있는 것은 서바이벌과 어울리지 않는다. 서바이벌은 생존! 약점이 보이면 찌른다. 고음 불가? 당연히 아웃!
그러다보니 초점은 자연스레 ‘누가 더 매력적인 음악을 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무결한 음악을 하는가?’에 맞춰진다. 심사위원들도 합격의 이유보다는 탈락의 이유를 찾는 쪽이 편해 보인다. 보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경연자의 단점을 이야기하는데 할애하는지. 칼자루를 쥔 자들의 기준이 그렇다면 경연자들의 준비과정도 당연히 단점 보완에 맞춰진다. 그래서인지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서바이벌 프로그램 우승자들은 대부분 깎은 듯이 노래를 잘 하지만 뚜렷한 개성을 찾기 어렵다.
이것이 비단 서바이벌 프로그램만의 문제일까?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서바이벌 아닌가. 튀는 순간 가장 먼저 생사의 기로에 선다. 모난 부분은 정을 대 ‘깎아라. 둥글게 둥글게.’ 하지만 애석하게도 살아남게 된 순간, 최우선 방침이었던 ‘둥글게 둥글게’는 최대 약점이 된다. ‘그래, 살아남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 갈 건데? 네가 가진 무기는 뭐야?’라는 질문에 할 답이 없다. 내 장점도 단점도 다 깎여나가 이제 난 너무 순결한걸. 생사문제를 떠나면 훨씬 풍요로워 진다.
보라, 버스커버스커의 음악이 몇 주 째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곡이 계속 음원차트 상위권에 있고 버스커버스커 음악을 듣지 않고 길을 걸을 수가 없을 지경으로 이 나라 전체가 ‘버스커버스커 앓이’ 중이다. 그들의 음반이 누구보다 빨리 출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성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개성이 대중에게 정확히 어필했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다. 누가 당신을 심사하는가? 누가 당신의 삶을 두고 서바이벌을 말하는가? 서바이벌 뒤 당신의 삶은 예비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