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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PD의 되감기]

▲ 영화 <달콤한 내세>
<달콤한 내세 The Sweet Hereafter> (1997)
감독: 아톰 에고이안(Atom Egoyan)
주연: 이안 홀름, 사라 폴리

“그들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 눈이 휘둥그레지게 입구 하나가 쩍 생겼지 / 마치 동굴 하나가 갑자기 생긴 것처럼 / 그 피리 부는 사내가 들어갔고 아이들은 뒤를 따랐네 /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가 들어갔을 때 / 그 문은 재빨리 닫혀버렸지 / 내가 모두라 그랬나 / 아니, 다리 저는 아이 하나는 남았다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해믈린의 피리 부는 사나이> 중 일부

아이들이 동굴 속으로 다 사라져버린 도시, 엄밀히 말해 단 한 명의 다리 저는 아이의 절망과 어른들의 슬픔만이 남은 도시. 아톰 에고이안의 1997년 작 <달콤한 내세>는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한 마을, 눈길에 미끄러진 스쿨버스 한 대가 강바닥으로 꺼지고 14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는다. 절망의 눈보라가 가득한 이 마을, 전형적인 앰뷸런스 체이서(ambulance-chaser)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가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린다. “우연한 사고란 없지요”라고 하며 남은 부모들을 설득하는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승소에 대한 금전적 대가다. 아이러닉하게도 미첼 역시 아이를 잃어간다. 그의 딸 조이는 마약 중독자로 수 년째 가출 중이다.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첼은 당시 사건을 조합한다. 어떤 약한 연결 고리를 찾아 소송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눈 아래 조용히 묻혀있던 샘 덴트(Sam Dent) 사람들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불륜, 근친상간 등과 같은 인간의 풍경들은 그림 같은 설원의 풍경에 더욱 대비된다. 해믈린 사람들이 피리 부는 사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잃은 것처럼 이 곳 샘 덴트 마을 사람들 역시 천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록 가수를 꿈꾸었던 한 소녀, 니콜은 그 사고로 다리를 잃는다. 마치 해믈린의 남은 한 소년처럼 가장 정확한, 그리고 가장 슬픈 목격자가 된다. 브라우닝의 시 속 그 다리 저는 소년이 슬퍼하는 이유는 그는 ‘남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춤을 추며 흥겹게 피리 부는 사내를 따라 들어갔던 아이들의 희열을 그는 결국 누리지 못한 것이고 오직 아이들을 잃어버린 도시의 절망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다. 남은 아이가 더 불행하고 가버린 아이들이 오히려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고 조용히 되새겨본다. 순간, 지독한 염세주의가 뇌리를 덮친다.

영화의 마지막, 미첼에게 에이즈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조이의 전화가 걸려온다. 미첼은 조이가 3살 무렵, 산장에서 세 식구가 누워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갑자기 조이가 독거미에게 물려 한없는 절망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미첼은 조이가 그 때 차라리 죽어버렸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 오정호 EBS PD·EIDF 사무부국장
우리 인간에게 피리 소리는 느닷없이 들려온다. 또 무엇을 가져가 버릴까. 행복의 순간은 찰나에 가깝고 절망의 동굴은 불쑥불쑥 열린다. 이 영화 <달콤한 내세>는 보편적인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다. 하지만 한없는 절망뿐일까? 니콜이 불렀던 노래 가사를 음미해본다.

“좀 더 부드럽게 말해요/ 좀 더 요란하게 일해요 / 좀 더 달콤하게 노래해요/ 좀 더 길게 사랑해요// 여기 / 여기 우리가 가진 것이 모두 하늘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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