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응답하라 1997>. 한 케이블 프로그램이 ‘응답하라’로 크게 히트했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회고지향의 본성 탓인지, 차라리 지금보다 그 때가 행복했다는 현실불만의 탈출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과 달리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는 그 프로그램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열광도 일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광하는 후배를 보면서, 아 너에게도 아픔과 상실이 뒤엉킨 시대사가 있었구나, 하고 느꼈을 뿐입니다.

그들과 약 10년에서 15년 차의 사람들. 저를 비롯한 그들은 이제 친구들을 가끔 문상자리에서 주로 만나게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초상집에서 서로에게 술잔을 기울이며 돌아갈 수 없는 그날들을 마치 ‘군대 시절’ 이야기하듯 무수히 되뇌는 그들. 해방 후 처음으로 코드화되어 특징 지워졌던 이 인간군상들을, 사람들은 오래 전 ‘386’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들은 ‘80년대’라는 암울했던 시대의 희생양들이자, 가여운 아들딸들이었고, 그래서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청춘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100만 청년애국학도라는 이름으로 80년대라는 굴곡진 한국현대사를 맨몸으로 헤쳐 온 주역들이었던 이들은 한 세대를 격해서 지금 50세를 전후로 한 장년의 세대가 되어 한국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중추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지나오는 사이 이들에게 붙여졌던 아름다운 헌사(獻詞)들은 대부분 퇴색했거나 변절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기도 했으니, 이 세대를 아우를 새로운 수식어를 찾기가 참 난감합니다.

일각에서는 486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좀 더 지나면 586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컴퓨터나 휴대폰이 그 명명과정에서 숫자를 올리면서 진화해 나가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갈수록 보수화 되어가고 기득권화 되어가는 이 세대들에게 이러한 명명방식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민주화 이후 몇 차례의 대선과 비교해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했던 지난 2007년 대선. 두 개의 정권을 어렵게 창출하고도 허무하게 정권을 보수기득권 세력에 내어준 대가는, 지난 5년간 참 혹독했습니다. 저는 지난 5년의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 낸 근본적 책임의 상당 부분이 이른바 이 ‘386세대’에게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청년에서 기성세대로의 성장과정에서 능력 있고 책임감 있게 진화하지 못했으며, 무책임하게 산업화 세대들을 추종하거나 그들에게 흡수되었고, 나아가 스스로가 속물성을 추구하고 실현해 나가는 세대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무슨 큰 죄를 지었거나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선택을 한 건 아니었으나 앞서의 범주에서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취직에 목을 맸고, 재테크를 하고, 집을 사려고 몸부림치고, 월급의 태반을 쏟아 부으며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끝도 없는 경주를 해댔습니다. 물론 그러한 삶을 의심도 하고 회의도 했지만 말입니다. 때론 이젠 모두들 지치기도 한 거 같아 서로에게 측은지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달려오고, 변해 온, 20년이고 30년. 한 시대의 짐을 온통 짊어지고 부서지고 깨어졌던 세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또다시 무거운 시대적 책임을 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는 이른 바 80년대 대학생 세대 당사자들보다 그들의 자식 세대가 살아갈 미래를 조건 짓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번 대통령선거는 40대의 선택에서 승패가 갈릴 거라고 예측합니다. 80년대 군사독재에 맞선 그들의 순수하고 용기 있는 행동들이 이 땅에 민주화의 봄을 불러왔듯, 그 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들의 지혜롭고 책임 있는 선택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붕괴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되살려 내는 역사적 견인차가 될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는 인간, 민주주의, 공존과 공공의 가치가 확고하게 중심에 서고, 새로운 시대적 가치들로 확장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에게 물려 줄 세상은, 사는 게 사람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가장 어두웠던 시대.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들의 시대를 격렬하게 관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추종과 변절로 자신들의 시대적 소명을 다하지 못했던 세대 386. 그들에게 12월이 되기 전에 외치는 한마디, “응답하라! 386!”입니다. 30년 전 그들은 “3000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를 부르며 모두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