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심의규정 개정에 “국보법 방송심의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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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심의위,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 ‘논란’

결국 또 6대 3이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 이하 방심위)가 9일 방송심의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 가운데 방심위원들의 자의적 해석과 적용에 대한 우려가 높았던 제25조의 2(민족의 존엄성)는 일단 신설이 유예됐지만, 제29조의 2(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등)는 정부·여당 추천 위원 6인의 뜻에 따라 신설을 확정했다. 또 그간 언론계 안팎에서 끊임없이 축소와 폐지를 주장해 온 방송심의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1조(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 등은 현행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민족의 존엄성’ 조항 신설안 ‘일단’ 폐기했지만…

방심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방송심의 관련 6개 규정과 정보통신심의규정 개정을 의결했다. 지난해 11월 27일 방심위가 이들 규정 개정안을 입안 예고했을 당시부터 방송심의규정의 일부 신설 조항 등이 논란이 됐다.

대표적인 게 “방송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역사적 사실 또는 위인을 객관적 근거없이 왜곡하거나 조롱 또는 희화화하여 폄훼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한다”는 내용의 ‘민족의 존엄성’ 관련 조항과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관련 조항이다.

두 조항 모두 방심위 공청회(2013년 12월 16일)에 참여한 언론학자와 언론·시민단체는 물론 법조인들과 다수의 현업 언론인들까지도 ‘이현령비현령 심의’에 대한 우려를 키울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부분이다.

실례로 방송심의 관련 규정 개정을 위해 방심위가 개최한 공청회에서 이민규 중앙대 교수는 ‘민족의 존엄성’ 조항과 관련해 “역사적 인물 등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조롱·희화화해선 안 된다는 데 객관적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고,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에 대해서도 “의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민족의 존엄성’ 규정과 관련해선 앞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정적 측면을 조명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시민방송 RTV에서 편성한 것을 두고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다큐”라는 평가를 하며 중징계를 의결했다는 점에서 “제2의 <백년전쟁>을 막으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왔다.

이런 가운데 이날 회의에 사무처는 ‘민족의 존엄성’ 조항의 신설은 제외하는 안을 보고했다. ‘민족의 존엄성’ 조항 신설안 폐기의 이유로 “현행 제25조의 3항(방송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과 중복되며, 객관성·명예훼손 등 타 조항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자체 규제심사위원회의 심사와 입안예고·공청회 등에서 나와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엄광석 위원은 “‘민족의 존엄성’ 조항을 살려도(신설해도) 문제될 게 없지 않냐”며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박만 위원장은 “하도 반대의견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라고 답하며 “그 조항이 없어도 다른 조항을 적용해 제재가 가능해 이번엔 한 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은 이어 “올해에도 심의규정 정비 자문단을 운영할 테니 (다시) 자문단 (논의) 의안으로 상정을 할 것”이라며 “심의규정 개정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고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다시) 여론을 수렴해 볼 테니, 이 선에서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당장은 반대 여론이 높아 개정을 강행하진 않지만, 언제든 재논의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이다.

▲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한국PD연합회, 언론노조, 방송기자연합회,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등이 9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방송·통신심의규정 개정 반대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언론노조
제29조의 2 신설에 대한 野 추천 위원들 ‘수정’ 제안 ‘무시’

반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은 당초 안대로 신설하기로 했다. 정부·여당 추천 6인이 밀어붙인 결과다. 그러나 해당 조항의 신설은 언론계 안팎에서 강하게 반대한 부분이다. 여권 성향 위원들이 압도적 다수(9인 중 6인)를 점하고 있는 인적 구성을 기반으로 정권의 이해에 호응하는 심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해당 조항이 신설될 경우 자의적 해석과 적용의 우려를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건식 MBC PD(MBC PD협회장)는 이날 회의에 앞서 방심위가 위치한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진행한 심의규정 개정 반대 기자회견에서 “제29조의 2(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등) 신설은 얼핏 문제될 게 없어 보이지만,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헌법 위반이라고 몰아붙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의 방심위 버전이라 할 만한 조항”이라고 비판했다.

박 PD는 지난해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를 제기하며 “통합진보당은 강령 등 그 목적이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황교안 법무장관)고 말한 것을 언급하며 “해당 조항이 신설되면 방송이 통합진보당의 입장과 동일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날 회의에서 야당 추천 위원 3인도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에 반대했다. 장낙인 위원은 “이미 방송심의규정 제7조 3항(방송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신장 및 민주적 기본질서를 유지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에 있는 내용인 만큼 굳이 신설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만 위원장은 “제7조 3항은 총칙으로, 제재를 할 때 총칙을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니 각칙(各則)에 관련 내용을 넣어 보완하자는 것일 뿐, 사실상 달라지는 부분은 없다”며 신설을 주장했다.

이에 장 위원은 “그간 제7조 3항에 의거해 제재를 해왔다”고 반박한 뒤 “그럼에도 각칙을 둬야 한다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경신 위원도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을 현재처럼 추상적으로 할 경우 집행자(방심위원)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적용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한 뒤 “그간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내용들, 이를테면 유신정권과 군사쿠데타를 옹호하는 내용의 방송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방송을 제재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조항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박경신 위원은 “국민의 기본권 관련 내용은 제외한 채 기본질서에 대한 부분만을 방송 제재의 기준으로 삼는 건 위험하다”며 “시민 집회에 공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됐음에도 방송 보도에서 시민의 침해된 기본권을 무시했다면 그 또한 제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택곤 상임위원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에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자는 수정 제안을 던졌다.

그러나 정부·여당 추천 위원 6인은 “기본질서 안에 기본권은 포함된다”(박만 위원장, 권혁부 부위원장)며 수정 제안을 반대하고 원안 의결을 밀어붙였다. 박경신 위원은 “수정안이 제시가 됐으면 왜 그런 제안이 나왔는지 논점을 파악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최대한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방심위 규정 어디에서도 심의규정 개정 의결 시한을 제한하고 있진 않다. 박경신 위원의 지적처럼 토론을 위한 시간을 더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만 위원장은 “다수가 원안이니 원안대로 처리하겠다”며 6대 3 구조에 따른 수적 우위를 앞세운 의결을 강행했다.

축소·폐지 요구 계속된 공정성·재판 중인 사건 관련 조항은 현행 유지

이날 회의에서 방심위원들은 그간 언론계 안팎에서 계속해서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방송심의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1조(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 등에 대한 개정 논의를 하지 않았다.

방송심의규정 제9조는 지난 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방심위의 징계 결정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CBS <김미화의 여러분>과, 최근 손석희 앵커의 JTBC <뉴스9>에 중징계를 내리는 등 정치심의에 악용돼 온 대표적 독소 조항을 꼽힌다. 제11조 또한 국정원의 무리한 간첩 수사를 지적한 KBS <추적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 판결의 전말’ 편에 대해 방심위가 중징계를 의결한 근거로 활용돼 논란이 일고 있다.

박만 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제11조와 관련해 “개정안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신중하자는 의견이 있었다”며 “향후 자문단에 의안을 올려 충분히 검토하고 의견 수렴을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공정성 조항(제9조)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었다.

한편 방심위의 이 같은 방송심의규정 개정에 대해 한국PD연합회와 언론노조, 참여연대 등 9개 언론·시민단체는 “여야 추천 6대 3이라는 위원 구성 하에서 독소 조항들을 그대로 둘 경우, 그간 방심위가 보인 이중잣대에 의한 정치심의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은 “개선 대신 개악을 택한 방심위 해체 투쟁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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