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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②]

‘개XX', 요즘 이 말이 자주 들리는데, 세상 돌아가는 꼴에 화나는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제발 그 욕 좀 하지 말라”고 사정하곤 한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 말이 개에 대한 부당한 모욕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개가 거짓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강기훈 씨는 23년 만에 ‘유서대필’조작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검찰은 기어이 상고했다. 과거의 잘못을 진솔하게 사과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기훈 씨가 무죄라는 걸 모른다면 IQ가 개만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품성이 개만 못한 것이다. 담당 검사는 별명이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개”란다. 진돗개들에게 어울릴 칭찬을 듣는 그 검사, 참 자랑스럽겠다.

잠깐 신문을 훑어봐도 개XX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개나 사람이나 먹을 것 챙겨주는 누군가에 충성하는 건 똑같으니 ‘개XX’는 욕이 아니다. 잘 먹여 줄 주인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킁킁거리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입을 여는 바로 그 순간 개XX란 말은 과분한 칭찬이 되고, 개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 된다.

‘아테네의 개’로 불린 디오게네스(BC.404~323)는 사회 참여를 일체 거부하고 큰 도자기 항아리 속에서 지냈다. 알렉산더 대왕이 소원을 묻자 “햇빛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오”라 대답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더도 덜도 말고 딱 개만큼만 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희곡과 대화 몇 편, 무정부의 유토피아를 그린 ‘공화국’(Republic)을 썼다는데 전해지지 않아 그의 사상을 조목조목 알 수는 없다. 숱한 일화로 짐작건대 “완전한 무소유가 아니면 자유롭지 않다”는 게 요체였던 것 같다. 고향 시노페에서 아테네로 가던 중 노예 한 명이 도망쳤는데, 이때 그가 한 말이 전해진다. “노예가 나 없이 살 수 있다고? 그럼 나도 노예 없이 살 수 있어.” 그의 재산은 잠잘 때 쓰는 항아리와 밥 먹을 때 쓰는 식기뿐이었는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맨손으로 밥 먹는 걸 보고 그릇을 내버렸다고 한다. “내가 왜 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쓰고 있었을까?”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에서 거지 생활로 연명하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돈이야말로 사람의 품성을 갉아먹는 악의 씨”라고 설교했다. “사람들의 관습과 규범이야말로 ‘위조화폐’와 다름없다”며 “진실은 자유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밥을 공짜로 얻어먹은 게 아니라고 자부했다. 그때그때 사람들에게 ‘지혜의 말’로 밥값을 했다는 것이다.

▲ 왼쪽부터 카스파르 데 크라이어의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1650년 경),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11년) 중 디오게네스를 묘사한 부분.
그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유치장이나 정신병원에서 보내면 딱 좋을 언행을 일삼았다. 저잣거리에서 대변을 보았고, 심지어 자위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배고플 때 배를 문질러서 이렇게 해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개처럼 시장 바닥에서 뒹굴며 인생을 얘기했다 하여 ‘견유학파’(犬儒學派)라 불린다. 그리스말로 개를 뜻하는 ‘퀴온’(kuon)을 따서 ‘퀴니코스(Kunikos) 학파’라 한 것. 이 말은 ‘냉소적’(cynical)이란 영어 단어의 어원이 됐다. 부질없는 세상사를 비웃는 게 그들의 주 업무였던 셈이다.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은 그가 볼 때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이 주고받았다는 대화가 전해진다.

디오게네스가 물었다.

“폐하께서 지금 가장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그리스를 정복하는 거지요.”

“다음엔 또 무엇을 바라십니까?”

“소아시아 정복하는 거지요.”

“그 다음은 또 무엇이지요?”

“세상을 정복해야겠지요.”

“그다음은 또 뭐죠?”

“그땐 나도 좀 쉬면서 즐겨야지요.”

디오게네스의 결론, “이상하군요, 그럼 왜 지금 당장 쉬면서 즐기지 않으십니까?”

그가 볼 때,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며 영토를 확장한 알렉산더는 가는 곳마다 오줌을 갈기며 영역 표시를 하는 개떼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위대하다”는 세상 사람들의 칭송에 그가 우쭐해 할 때, “차라리 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대왕 곁에 머물며 ‘지적 권력’이 된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는 경멸했다. 우두머리 개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거야 그렇다 치고, 그에게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며 ‘석학’ 소리를 듣고 칭찬에 취해 있다면 개보다 나을 게 없었다. 디오게네스가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창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이 원할 때 아침을 먹지만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먹지.”

디오게네스는 실제로 개를 예찬했다. “개는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아간다. 개는 아는 척하면서 추상적인 철학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사기를 치고 있는지,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과 달리 개는 진리를 향해 정직한 소리로 짖을 뿐이다.”

한 시민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자기가 개라고 생각하십니까?”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

“음식을 주는 사람에겐 꼬리 치면서 반기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달려들어 물어버리기 때문이지.”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이 다 그렇듯, 디오게네스의 일화 중 일부는 꾸며내거나 부풀린 얘기일 수 있다. 플라톤과 나눴다는 다음 대화는 아마 픽션일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미아에서 설파했다. “인간은 털 없는 두발짐승이다.” 이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가 닭 한 마리를 잡아서 털을 모두 뽑은 뒤 플라톤에게 달려갔다. “보시오, 여기 사람을 가져왔소.” 플라톤의 논리에 허점이 있다는 걸 증명한 일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권세와 지식을 자랑하는 인간이 결국 벌거벗은 닭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보여준 게 아닐까?

그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개만큼만 하는 사람”이 그 시절에도 참 드물었나보다.


▲ 책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 자유와 예속의 원류’ⓒ필맥
박홍규 교수는 이 책에서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산더미 같은 저술을 남겨 ‘서양철학의 태두’로 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돈과 권력 - 엘리트 - 부자유· 불평등 = 노예 억압· 인간예속”의 상징에 불과하다. 반면 개처럼 살며 책 하나 남기지 않은 디오게네스는 “무소유 - 무계급 - 자유· 평등 - 노예 철폐· 인간해방”의 원류다. 금전만능의 경쟁사회에 던져진 오늘, 디오게네스에게서 배울 게 많다고 박 교수는 강조한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귀족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국내 학자들은 이 사실에 눈감음으로써 서민 대중들을 기만해 왔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정의’(正義)의 개념을 오래 고민해 온 법학자의 양심일 것이다. 박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계급성을 폭로하고,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무소유의 삶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철학 교수들은 이 책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학술적 논증보다 주관적 주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극단적이란 게 꼭 단점만은 아닐 것이다. 재미있고 명쾌하다. 디오게네스의 삶과 생각을 알려 줄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난해하고 방대한 사상에 주눅들어 있는 이들에게 격려가 된다. 박 교수의 시각에 이끌려 ‘불치의 편견’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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