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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③]

3월 3일은 ‘삼겹살 데이’, 애꿎은 돼지들이 또 수난을 겪게 생겼다. 옛날 똥돼지, 오늘날 흑돼지의 고향인 제주에서 흐뭇한 돼지 얘기가 피어났다.

“(국회의원) 4, 5선은 비계가 껴서 맛이 없다. 잠만 자고….” 2012년 4·11 총선 당시 민주당 강창일 후보는 5선에 도전하는 새누리당 현경대 후보를 돼지에 빗대서 깎아내렸다. 강 후보는 3선에 도전하는 자기를 찍어달라며 의연히 돼지 얘기를 이어갔다. “(돼지로 치면) 초선은 60㎏, 재선은 80㎏이고, 3선이 딱 먹기 좋고 맛 좋은 100㎏.” 현 후보는 낙선했고, 약이 올랐다. 급기야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나를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여 지지율이 역전됐다.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

지난달 23일, 법원은 돼지 논란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원고뿐 아니라 피고 자신도 돼지로 비유했고, 원고를 돼지에 비유하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라…” 결론은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 돼지도 생각한다는 점을 사람들은 좀체 생각하지 않는다.(위), }MBC 스페셜-고기 랩소디’의 한 장면(2011년 6월 방송, 아래).
이 판결에 현경대 선생께서 발끈하실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친박 원로 7인’의 어엿한 일원 아니신가? 대통령이 하필 돼지를 국가원로로 모셨다면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있겠는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란 중차대한 직책을 맡아 통일 문제를 자문하시는 분이 알고 보니 돼지였다면 그 통일이 ‘대박’나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가 돼지라고 생각할 얼빠진 사람은 없으므로 애초 명예훼손도 성립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오히려 강 의원이 염려된다. 당시 현경대 후보의 항변대로 그가 ‘돼지 발언’ 덕에 3선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4선 · 5선에 도전할 경우 “비계가 껴서 맛이 없고 잠만 잔다”는 악담이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송구스럽지만 돼지 혐의가 더 짙은 건 강창일 의원 쪽이다. 총선 유세 때 느닷없이 돼지 얘기를 꺼낸 뒤, 다름 아닌 자기가 ‘맛 좋은 돼지고기’라고 강조하셨으니 말이다.

강 의원은 돼지고기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다. 작년 8월 18일 출판기념회 때 술과 돼지고기를 내놓았다가 새누리당한테 엄청나게 씹히신 적도 있다. 정성껏 손님 접대할 메뉴로 ‘맛 좋은 돼지고기’를 고른 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 난리였을까? 흠, 제주 도민들이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점이었고, 고(故)김대중 선생 4주기 추모일이란 걸 미처 생각 못 했으니 할 말이 없었지. 아무튼 ‘맛 좋은 돼지고기’ 탓에 몸이 불어나서 자기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실까 싶어 조금 걱정된다.

네티즌의 다양한 반응은 돼지 논란에 푸짐한 양념이었다. “초선이든 5선이든 사람 나름”이라는 지당한 의견도 있었지만 “2선, 3선 넘으면 국회의원이 아니라 돼지 맞다”, “돼지는 죽어서 고기를 남기지만 국회의원은 살아서 혈세만 축낸다” 등 삐딱한 의견이 많았다. “돼지들이 기분 나빠하겠다”, “돼지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극단적인 댓글도 있었는데, 돼지의 억울한 마음을 대변해 준 기특한 사람이다.

법륜 스님의 날카로운 지적. “너무 많이 먹는 사람에게 돼지 같다고 하는 건 옳지 않다. 너무 많이 먹는 돼지를 가리켜 사람 같다고 하는 게 맞다.” 돼지가 미련하게 많이 먹고 뚱뚱한 동물이라는 건 사람들의 편견일 뿐이다. 돼지의 체지방률은 평균 15% 이하로, 성인 여성 20~30%보다 낮고 성인 남성 10~20%와 비슷하다. 돼지가 지저분한 것은 땀샘이 없어서 바닥에 뒹굴어야 체온을 낮출 수 있는데, 축사가 좁고 더러워서 어쩔 수 없으니 돼지가 아니라 사람을 탓할 일이다. 지능이 꽤 높아서, 축사를 조금만 넓혀 주면 용변도 한 곳에서만 본다. 사람보다 후각이 뛰어나서 마약탐지 수사관으로 활약한다.

이 지점에서 ‘피론의 돼지’가 떠오른다. 이른바 ‘철학사’ 한구석에 전해지는 이야기.

피론이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심한 폭풍우 때문에 금방이라도 배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야단법석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 물을 퍼내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마침 그 배에는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좌충우돌 떠들어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밥을 먹고 있었다. 피론은 이를 가리키며 “현자는 언제나 이 새끼 돼지처럼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생사를 다투는 배 위에서 누군가 정색을 하고 “현자는 언제나 이 돼지처럼…” 어쩌고 한다면 <개그 콘서트> 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는 피론의 사상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이 일화를 소개한 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이성이 오히려 평정을 잃게 하고, 지식이란 게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못하게 만든다면 이성과 지식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었다.

흔히 ‘회의주의의 원조’로 불리는 엘리스의 피론(BC.360~270)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신 뒤, 혼란스런 시절에 태어난 인물이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시대, 모두 자기가 옳다며 논쟁을 벌였지만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다. 어떤 주장을 펴든 반대 주장에도 똑같은 무게의 논거를 댈 수 있으므로 결론이 날 수 없었다. 진리라고 주장하는 의견은 독단이었고, 그것은 허무했다. “아름다울 것도 추할 것도 없으며, 옳을 것도 그를 것도 없다”는 것 하나만 분명해 보였다.

피론은 회의를 극단까지 몰고 가서 그 결과대로 살고자 했다. 그는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돌아 다녔다. 위험이 닥쳐도 회피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 예방조치 없이 마차든, 절벽이든, 개(犬)든 태연히 부딪쳤다. 그가 90살까지 장수를 누린 것은 동료들이 그의 곁에 붙어 다니며 보호해 준 덕분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평정이었다. ‘판단 중지’(Epoche)는 피론이 말하고자 한 핵심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말라.” 사물의 진실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으므로 “이렇다, 저렇다”, “좋다, 나쁘다” 판단하면 충돌이 오고,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쟁만 일으킬 뿐이다. 판단을 중지한 사람은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흔들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남의 의견에 휘둘리지도 않고 불필요한 걱정으로 위축되지도 않을 것이다.

‘판단 중지’에는 흐트러짐 없는 ‘평온한 마음’(Ataraxia)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는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했다. 이야기 하는 도중에 누군가 일어나서 가 버려도 그는 혼자, 자신을 상대로 끝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피론의 돼지’는 ‘평온한 마음’(Ataraxia)을 이미 체득하고 있는 셈이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의연히 밥을 먹는 돼지의 지혜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그 지혜는 조금 의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세상에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면 어떤 행동도 무의미한 게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관습과 규약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피론의 말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습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살다보면 한 가지 입장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가령, ‘비정상의 정상화’란 주술(!)이 판치는 요즘, 자기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헷갈리는 불행한 사람이 늘고 있다. “뭐가 정상인지 판단을 유보하고 침묵하는 너야말로 돼지보다 나을 게 뭐냐”고 항변할 만하다.

국민에게 ‘마음의 평정’을 주려고 앞장서야 할 사람은 아마 대통령과 정치인일 것이다. 그게 잘 안 되니 ‘피론의 돼지’에게서 ‘마음의 평정’을 배우자는 이상한 사람까지 나타난 셈이다. 분명 비정상인데, 누가 이 사태에 책임감을 느껴야 옳을까? 상식을 벗어난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 의원 후보 두 분이 벌인 ‘돼지 논란’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새 봄, 햇살이 밝으니 일단 웃는 게 낫지 않을까?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갈 일이다.

모처럼 ‘돼지 논란’으로 유쾌한 화두를 던져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 책 <피론주의 개요> ⓒ지만지고전
[책 그리고 인문학]
피론주의 개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지음, 오유석 옮김, 지만지고전, 2008)

아테네가 몰락한 뒤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마음의 평온을 구하는 철학사조가 번창했다. 그 중 하나가 ‘회의주의’였다. 엠피리쿠스(AD160~210)에 따르면 ‘독단주의’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단언하며 탐구를 중단했고, ‘아카데미아’는 진리에 이르는 게 불가능하다며 탐구를 포기했다. 반면 ‘피론주의’는 판단을 유보한 채 진리를 계속 모색했다. 그가 소개한 피론의 태도는 검증 가능성(verifiability)과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통해 사실에 다가서는 현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닮았다.

이 책은 피론이 세상을 떠난 뒤 400여년이 지나서 나왔다. 피론의 삶을 생략한 채 ‘피론주의’라는 교의를 설명, 그가 온몸으로 실천한 ‘회의’를 이론적 ‘독단’으로 변질시켰다. 철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사람에겐 좋은 안내서지만, 철학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 사람에겐 실망스러울 것이다.
 
엠피리쿠스에 따르면 ‘피론주의자’는 어떤 일이든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늘 “…라고 생각된다”, “…로 보인다”는 식으로 말했다. 17세기의 몰리에르는 이 애매한 화법을 “…라고 생각된다고 보이는 걸로 사료된다”는 식으로 풍자, 코미디 소재로 삼았다.
 
피론은 ‘피론주의자’가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예수가 ‘예수교도’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지적대로 “피론과 같은 자세로 살아야만 그의 제자”라면, 엠피리쿠스는 피론의 제자가 아니다.
 
흠…. 이런 식으로 막 판단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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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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