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공기에 갇혀 ‘늑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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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주의 Chat&책]

겨울이 지나갔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었는데, 그 끝에 다다르자 아쉬움이 급습했다. 누가 내 겨울을 가져간 거지?

도둑맞은 억울한 기분이다. 쨍하게 추운 날 맛볼 수 있는 코끝시린 상쾌함도, 신나게 아이와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든다거나 동네 비탈진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유쾌함도 이번 겨울에는 없었다. 반짝 추위 끝에 어김없이 도시를 잿빛으로 가두는 미세먼지가 발목을 잡았고, 그나마 내린 눈발에도 중금속 섞인 미세먼지 걱정에 한참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쨍한 겨울이 그리워 책장을 둘러보다 책 한권을 끄집어내었다. 2년 전쯤 우연히 읽은 <울지 않는 늑대>(돌베개). 캐나다의 생태학자이자 작가인 팔리 모왓이 젊은 시절 늑대 연구에 관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아북극 지역에서 1년여를 보낸 기록이다.

▲ ⓒ돌베개
야생 늑대의 생태에 관한 심각하고 까다로운 연구 보고서를 읽게 되는 건 아닐까 싶던 우려가 무색하게, 막상 읽기 시작하자 책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선사했다. 이내 얼음과 땅이 뒤섞여 펼쳐진 아북극 툰트라지대를 배경으로 주연배우 ‘늑대들’과 얼뜨기 조연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한 모험담에 빠져들었고, 어릴 적 책장을 차마 덮지 못해 밤새워 읽던 <15소년 표류기>를 다시 만난 기분으로 오랜만에 ‘읽는 재미’를 맛보았다. 그러니까 책은 내게 한편의 ‘모험 소설’과도 같았다.

어느 해 여름 팔리 모왓은 생물학자이자 캐나다 정부 소속 공무원으로 순록 개체수의 급격한 감소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아북극 지역에 파견된다. 사람들이 지목한 원인은 바로 늑대무리. 인간이 바라본 늑대는 “포악하고 강력한 킬러”였다.

그러나 실제 팔리 모왓이 책에서 그리는 늑대는 우리가 그 동안 가져온 야수의 이미지와 너무나 달랐다. 1년 여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의 사랑, 가족, 유대관계, 식습관 등은 때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우아하고 격 있는 늑대 캐릭터와 저자의 관찰력, 유머가 만나면서 <라이언 킹> 못지않은 드라마도 엿볼 수 있다.

결국 순록을 대학살했다는 죄목을 쓴 늑대무리에 대해 밝혀진 진실도 달랐다. 어마어마한 순록 학살의 행위자는 바로 인간들. 단지 재미로 순록 사냥에 나선 인간들이 죽인 순록의 수는 그야말로 학살이라 부를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인간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늑대를 공포와 미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순간들도 꽤 많았다. 아마도 첫 만남이었던 듯하다. 저자가 늑대를 관찰하기 위한 긴 잠복 작업 중 잠시 등을 돌리고 소변을 보던 틈에 늑대가 자신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걸 알게 되는 장면.

어느 순간 감시자가 감시를 당하게 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자존감에 손상을 입고, 자아에 심한 동요가 일며, 스스로 위상을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신을 세세히 묘사한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감시자와 감시대상이 어느새 뒤바뀌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반전되는 순간의 해학이 자연스레 문명과 자연 파괴에 대한 조소와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최문주 책 읽는 엄마·잡문가
나에게는 소설적 요소들로 인해 더 흥미로웠던 이 책이 일부에서는 ‘소설(같은 이야기)’이라며 비난받기도 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팔리 모왓의 서문 중 일부를 옮긴다.

“사실이란 진실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의미가 있으며, 삶을 이해하는 데 유머가 차지하는 역할은 지극히 중대하다.”

뿌연 먼지에 휩싸인 겨울 끝자락, 북극해 연안 툰드라로 떠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늑대를 만난 것으로 잠시 숨통을 틔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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