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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PD의 음악다방]

바흐의 건반음악에 현대적인 입김을 불어넣어 20세기에 바흐 붐(boom)을 일으킨 괴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의 이야기로 ‘기술 복제 시대’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에 대해서 잠깐 되짚어보고자 한다. 완벽주의자, 괴짜, 약물 중독자, 젊은 예술가들의 우상, 결벽주의자, 독설가, 대인기피증 환자, 무대공포증 연주가, 천재,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독창적이며 또렷한 바흐를 들려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Glenn Gould: 1932~1982) 골드베르그 디지털 리마스터링 앨범.

글렌 굴드는 수차례 반복 녹음한 것 중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편집해 음반을 만드는 완벽주의적 녹음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대해 역시 명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내가 2주에 걸쳐 똑 같은 소나타를 계속 녹음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무균의 정제된 소리를 얻어낼지는 모르겠으나 자연스러움이 얻어질 리 없다”며 굴드의 녹음 방식을 비판했다. 이에 평소에도 독설을 즐기던 굴드가 가만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는 바렌보임을 가리켜 “한 악장에 두어 번의 녹음으로 만족하는 게으름뱅이”라며 바로 맞받아 쳤다.

▲ 글렌굴드, 골드베르그 변주곡
굴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26년 만인 2008년에는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의 전설적인 1955년 판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녹음 정보만을 컴퓨터로 추출하고 정리해 디지털화된 정보만으로 컴퓨터가 피아노 음원을 연주한 깨끗한 음질의 또 다른 골드베르그 음반을 제작한 것이다. 음반을 발매한 음반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재연주(re-performance)라 명했다. 예상대로 일각에서는 이를 불경스럽다며 불쾌해했다. 이 음반엔 그렇게도 사랑했던 굴드의 ‘아우라’가 없다는 것이다. 굴드가 의도했던 강약, 뉘앙스, 빠르기, 터치 등등 모든 것이 디지털로 재현되었는데도 말이다(물론 이 녹음에선 굴드 특유의 웅얼거림은 없다).

그런데 과연 굴드가 살아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필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재미있어했을 것 같다. 일찍이 현대 문명의 테크놀로지 역시 완벽성을 추구하는 데 일조한다면 서슴없이 그 혜택을 누리려 했던 그가 아닌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진실성, 영혼, 리얼리티의 진정성 같은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가?

우리는 어쩌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를 살아가는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이라는 장르가 디지털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보정’과 ‘조작(일명 ‘뽀샵질’)의 경계를 두고 머리 아파하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우리는 왜 사진작가의 필터는 신성한 예술가의 도구로 여기면서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은 상스러운 조작질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일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에도 중세 수도사들의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던 성경책이 처음 인쇄기로 인쇄되어 나왔을 때의 충격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수도사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성경은 불경하기 짝이 없으며, 심지어 ‘악마의 장난’이라고 몰아붙여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담아내는 방법이 아무리 최첨단 디지털이라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콘텐츠 자체는 영원히 어쿠스틱일 수밖에 없다. 굴드가 남긴 바흐의 해석이 마그네틱 테이프에 남아있든, 디지털 정보로 재해석되었든 그 결과물은 글렌굴드라는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다. 종이 위에 인쇄된 명시(名詩)한 구절이 당신의 블로그 대문을 꾸몄다고 해서 그 시가 불경스러운 복제물이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김영욱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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