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만의 그녀가 아님을 인정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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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윤 PD의 포스트 라디오 ⑥]

“나만의 그녀인 줄 알았다. 열렬한 시간이 워낙 길었기 때문에 사랑이 식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도 그저 CF의 감각적 말장난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변했다. 잘생기고 매너 좋고 지갑 두둑한 남자들이 그녀 곁을 맴돈 지 몇 년째, ‘Torn Between Two Lovers’ 가사처럼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를 보면서도 근거 없는 믿음으로 잠깐의 열병이려니 했었는데, 이제 그들과 나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저 ‘좋은 친구’로라도 남은 것을 다행스러워해야 할 지경이다. 세상은 바뀌는데 늘 내 방식만 고집했던 나. 지금 돌아보니 오래 참아준 그녀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향기로운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연재물 내용이 바뀌었나 당황하셨죠? 아닙니다. 오늘 주제를 실감 나게 느껴보시라고 과장된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녀 이름은 ‘음악(Music)’입니다. 세상 바뀐 줄 모르고 그녀가 언제나 나만 바라볼 줄 알았던 바보 같은 남자 이름은 ‘라디오’고요.

과거 수십 년 간 라디오와 음반산업은 콘텐츠 소재와 홍보를 주고받는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이 필요한 시간’에 당연히 라디오를 켰고, 라디오PD들의 입사 동기는 십중팔구 ‘음악이 좋아서’였습니다. ‘라디오 = 음악’이라는 등식이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케이블, 뮤직비디오가 뜨기 시작하면서 휘청이던 라디오와 음악의 관계는 아이돌과 음원서비스 전성시대를 맞아 ‘연인에서 친구로’ 재조정됩니다. 뮤지션들은 멜론차트에 촉각을 세우고, 포털 음악서비스에서 새음반 쇼케이스를 시작합니다. 지상파TV 가요프로그램들마저 한지붕 식구인 라디오의 방송횟수를 순위 산정에 잘 넣어주지 않습니다. 가요 매니저들로 붐볐던 라디오 스튜디오 복도는 한산해진 지 오랩니다.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이 변했습니다. 국내 라디오방송사들은 갖가지 노력을 구사하며 ‘음악의 중심’ 자리를 되찾으려 하지만, 신세대를 아예 포기하고 같이 늙어가는 청취자들에 집중하는 ‘oldies and goodies’ 전략 정도가 겨우 먹히는 실정입니다. 그조차도 유효기간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요.

Smarter, Cheaper, More Like Radio, Beyond Music

2015년, 이제 음악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애인이 음악서비스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K> 등 TV프로그램이 음악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여기서 화제가 된 음악들도 결국 대부분 멜론 등 음악서비스들을 통해 재생됩니다. 이들은 음원 파일과 인터넷을 결합, 새로운 산업을 구축해왔으며, 모바일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날개를 달면서 음악시장의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많으면 경쟁자도 많아지는 법,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IT기업들이 뛰어들면서 경쟁과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음악서비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음악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라디오 입장에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습니다.

1. Smarter

큐레이션, 즉 음악을 골라주는 기능이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빅데이터 분석 기술 덕분에 내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또 좋아할지 나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SNS와 결합되어 내 친구들의 음악 취향까지 큐레이션에 더해지고(카카오뮤직), 음원 인식 기술을 더 해 지상파방송사 전문가들의 선곡도 통째로 데이터화합니다(다음뮤직의 ‘방금그곡’).

2. Cheaper

▲ T-Mobile의 ‘Music Freedom’ 요금제 광고 이미지
자금력을 갖춘 IT거인들이 속속 음악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가격 경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작년 중반부터 국내에도 무료 ‘스트리밍라디오’(국내의 비트, 삼성 밀크뮤직)나 기존 월정액의 반값서비스(SKT의 ‘T청춘)가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국내 유료서비스를 덤핑가격으로 보이게 했던 해외 유료서비스마저도 이런 대열에 합류하는 추세입니다(Spotify, Beats Music의 가족 할인제 도입).

여기에 더해 통신사들이 ‘zero-rating’(특정 인터넷서비스에 대해 데이터과금을 면제해주는 것)을 주요 음악서비스에 적용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T-모바일은 ‘뮤직 프리덤’(Music Freedom)요금제를 통해 iTunes Radio, Pandora, Rapsody 등 20개가 넘는 온라인음악서비스들에 대해 데이터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국내에도 이미 멜론과 벅스에 대해 데이터요금을 면제하는 요금제가 일부 통신사에 존재해 왔습니다. 돈 걱정에 음악서비스를 피하던 88만원 세대들도 음악서비스앱을 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3. More Like Radio

작년 음악서비스 분야의 화제 1순위는 단연 ‘스트리밍라디오’였습니다. 이미 선곡된 음악을 장르별, 주제별 채널로 묶어서 죽 틀어주는 것이죠. 다운로드가 아닌 스트리밍 방식으로 서비스되며, 라디오처럼 채널을 선택하여 들으니 ‘스트리밍라디오’로 불립니다. 사용자가 검색 등을 통해 곡을 골라 듣는 기존 음원서비스보다 훨씬 라디오에 가까운 사용 행태입니다. 주로 무료라는 면에서도 라디오와 비슷하다 보니, 월정액이 부담스럽고 선곡이 귀찮아서 기존 음악서비스를 쓰지 않던 수동적 음악소비자들까지 유혹합니다.

게다가 라디오보다 나은 점도 있습니다. 곡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곡으로 넘길 수도 있고, 채널수를 무한대로 늘릴 수 있으니까요. 국내에서는 한 스타트업 기업의 ‘비트’가 수개월 만에 100만 가입자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고, 막대한 보급대수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올라탄 삼성의 밀크뮤직이 대세를 굳혔습니다. 이에 질세라 SKT가 고령층을 공략하는 ‘T청춘’으로 틈새를 파고들었고, SK플래닛의 ‘뮤직메이트’, 엠크라스의 ‘앙코르’ 등이 출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선 이미 우리보다 몇 년 앞서 스트리밍라디오가 음악시장의 주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애플이 공을 들이고 있는 ‘iTunes Radio’도 스트리밍라디오로 분류됩니다.

▲ 비트패킹컴퍼니의 ‘Beat’(왼쪽), 삼성의 ‘밀크뮤직’(오른쪽)

4. Beyond Music

음악서비스들이 소리매체의 나머지 영역, 즉 사람의 말소리가 섞여 있는 오디오콘텐츠까지 영역을 넓히는 현상입니다. 음악은 기술적, 제도적으로 표준화되어 사업화가 용이한 콘텐츠 요소입니다. 이러한 ‘음악’을 고도화된 알고리즘으로 배열하여 들려주는 것으로 산업을 일군 음악서비스들이, 토크 오디오콘텐츠를 보강하여 ‘완전한 소리매체’로 거듭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스트리밍라디오가 지상파라디오 채널을 도입하기도 하고(iTunes Radio의 NPR, ESPN라디오채널 수급), 팟캐스트 서비스를 인수하거나 내장하기도 합니다(Deezer의 Stitcher 인수, Spotify앱의 팟캐스트 코드 내장). 음악 시장 주도권을 내준 지상파라디오 업계의 남은 팔(토크 콘텐츠)까지도 넘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기우만은 아닐 겁니다.

▲ iTunes Radio에서 음악채널과 같이 배열된 NPR과 ESPN

콘텐츠의 주력 장르를 재편해온 기술 변화

TV가 등장하기 전, 라디오는 뉴스, 시사, 정보, 드라마, 코미디, 토크쇼, 스포츠 중계, 음악 등 미디어가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종합 매체였습니다. 라디오에서 음악의 비중과 역할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TV가 다양한 장르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매체로 떠오르자, 라디오의 주력 장르는 ‘음악, 실시간 뉴스, 정보, 편지쇼’등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기술 환경의 변화가 콘텐츠의 주력 장르를 바꾼 것입니다.

TV등장에 비견되는, 혹자는 산업혁명에 비유하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디오 콘텐츠의 초점도 이전과 다르게 맞추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물론 음악은 여전히 라디오라는 소리매체의 중요한 소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진 상황은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법. 떠나간 연인에 대한 미련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자신을 황폐하게 하기 전에,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달라진 현실과 쿨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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