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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⑤] '시적 정의'

▲ 지난 7월 종영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종영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두 장면이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드라마 초반부였을 것이다. 재판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다른 두 판사가 약간의 언쟁을 하는 장면이었다.

임바른 판사(김명수)가 박차오름 판사(고아라)에게 법복을 입은 이상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질책했을 때, 박차오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판사일 겁니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기만 하는 판사 따위는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회차의 마지막 부분쯤이 되었을까. 최선을 다해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박차오름 판사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임바른 판사는 생각한다. “법복을 입으면 사람의 표정은 지워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지워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판타지 드라마에 어울리는 대사지만, 그럼에도 이 대사들은 꽤나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도 그것은 이 대사들 속에 녹아 있는 ‘사람의 표정’과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서 법관에게 요구하는 자질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법관에게 문학적 경험을 통해 배양된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자세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법관이 지녀야 할 두 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사사로이 마음을 쓰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 즉 사람의 표정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과 다른 타인의 표정에 새겨진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 세계적으로 저명한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쓴

<시적 정의>

우리는 종종 법관이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공명정대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유능한 법관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법관들이 얼마나 세속의 힘 앞에서 자신의 저울을 일부러 기울여 왔는지 알기에, 사람들은 차라리 법관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길 바란다. 그래서 일체의 타협이 없는 올곧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엄한 처벌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에게 이런 법관은 반쪽의 정의로움만을 지닐 뿐이다. 법관들은 종종 다른 이들이 어째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떠한 이유로 법 앞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의 부재는 종종 법이 유일한 지지대가 되어주어야 할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누스바움이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적이며, 열정적인 법관일까? 누스바움은 타인의 경험과 감정 속으로 완전히 몰입해 들어가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스바움이 요구하는 것은 적당한 거리와, 그 거리로부터 빚어질 수 있는 소외를 지워내는 상상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자기 자신의 이성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 상대방과의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생생한 현실을 묘사하는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할 줄 아는 능력, ‘공적 추론’이다. 누스바움은 이 문학적 상상력의 지평을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단순한 감정적 쏠림이나 상상력의 부재로 인한 고립을 피할 수 있는 좁은 길을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좁은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종 간접적인 경험은 단편적이고 평면적이기에, 오히려 그 경험들이 실제 숨 쉬는 사람들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 또한 문학 작품이라는 거리감이 주는 안도감은 그들을 상상해 내 곁에 불러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상상 속에 머물도록 할 수도 있다. 자신의 판단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 누스바움이 제시하는 방법은, 함께 독서하자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문학 작품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독서를 해 나간다면,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읽는 일이 가능해지며, 그래야만 문학 작품과 그것을 읽는 행위가 더욱 정의로운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방만한 문체,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주장들은 때때로 읽기를 더디게 하지만, 이 책은 결국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법관들은 인류 공동체에 대한 공적 추론 능력을 길러야 하며, 이 능력은 복수의 인물이 서로 자신의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길러지며, 특히나 특정한 종류의 서사문학(사실주의 문학)이 그 능력을 길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러니 이 책은 사실 특정한 소설 장르를 예찬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자질들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도구로서 사실주의 소설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책에서도 지나가듯 언급했듯이 사실주의 소설이 아닌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서도 누스바움이 요구하는 공적 추론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방송은 과연 이런 능력을 기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종종 ‘지루함’을 핑계로 감정적인 몰입을 요구하고, 사유보다 공감에 초점을 맞추는 일들이 오히려 내가 드러내려는 영상 속의 문제들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너무나 거대한 파도와 같고, 종종 우리는 그 위에서 서핑을 한다고 착각한다. 이미 파도 속에 휩쓸려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나의 일은 그런 상황에서 사리분별에 도움을 주고 있을까, 아니면 파도의 규모를 예찬하며 함께 휩쓸려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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